깡통로봇의 노래

기획자, 먹이사슬의 끝에 매달리다.

영혼기병깡통로봇 2004. 3. 3. 12:44


작년에도  크리스마스를 지하골방에서 거의 새로 만들다시피 할만큼 말도 안되는 수정사항들을 반영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여념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별 다르지 않은 내가 있다.

업무 스케줄을 만들고 아침부터 오후 3시까지 3차례에 걸친 부서별 회의를 하고 보니 그래도 작년 이맘때의 나와는 사뭇 다른 내가 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가장 반가운 나의 변화는 갑-을-병-정 중에 "정"이었던 시절이 대부분이 었다면 지금은 "병" 쯤이 되었다는 것이다.

10년이 넘은 나의 직장생활에서 갑이 되어본적이 몇번이었던가...
그 옛날에도 갑이었던 적이 단한번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어찌나 어리고 우매하였던지 "을"만도 못한 "갑"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갑이란 무엇인가?
자고로 갑이라는 것은 신과 동격체이며
나의 간과 쓸개를 24시간 365일 저당잡고 계신 분이며
이달치 카드값과 한겨울 따뜻하게 보낼 도시가스 요금을 해결하도록 해주시는 분들이다.

그리고 또한 언제 어느때고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내일 다시 준비하셔서 회의하시죠"
라고 말하며 앞문으로 걸어나가는... 조명발에 늘어진 긴그림자 멋드러지게 휘날리는 분이시다.

그러나 나의 20대에는

고생 많으시죠? 끝나면 밥한끼 대접하겠습니다.... 라고 말할줄 밖에 모르는 미숙하기 그지 없을 뿐더러 을만도 못한 갑에 불과했다.

지금 생각하니 또 울컥한다.

 

그러니 지금 나는 갑도 아닌 병쯤에서도 사뭇 행복하다.
정에게 만큼은 갑이 될 것을 생각하니 흐뭇하다.
정을 만나면 던져줄 숙제와 질문을 정리해본다. 물론 그들이 대답하기 힘들 것 같은 질문을 미리 도출해 보는 것이다.
나는 이미 어리숙한 20대의 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랑스럽지 아니한가..


그리고 정을 만났다.

그는 나의 숙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아...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그것은 계약 범위를 벗어 나는 것입니다.
이 계약을 지속시킬지에 대해서 저희 사장님과 다시 한번 논의를 한후에 다시 만나뵙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 그런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어리숙한 을이었으며 또한 지금...종이 보다도 가볍게 펄럭이는 갑이었던 것이다.

갑이 원하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려왔던 나는
주지 않아도 되는 것을 달라하는건 계약위반이므로 줄것이 없노라고 친절하고 상냥하게 말하는 을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닫는다.
왕성한 사회할동으로 마누라와 그의 떨거지의 돈줄을 쥐고 있는, 반짝반짝 빛나는 생물이었던 가장은 절대 권력을 손에 쥔 제왕이지만

퇴직금으로 막내딸 결혼시키고 연금과 아들이 주는 용돈을 움켜쥐고 노인정에 출근하는 가장은 권력과 힘의 제단에서 벌거벗겨진채 내쫓겨져 어두운 그늘에서 천대받는 천덕구러기일 뿐이었던 것이다.

 

아... 비유가 너무 뻘쭘 했나..
한마디로... 우리의 "정"은 "을"의 탈을 쓴 잘나가는 고급 제과계의 마에스트로였고
"갑"의 탈을 쓴 채 길에서 사먹는 붕어빵만이 모든 빵의 정수라고 믿고 있었던 나는
마에스트로에게 붕어빵 값을 줄터이니 "소보루 빵"을 만들어 달라고 떼를 쓰다 꾸지람을 받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꿈은 계속 된다.
갑이 되자...
역시.. 사람은 갑이 되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