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로봇의 노래

허술하게 살게 하는 그녀들의 수다

영혼기병깡통로봇 2003. 3. 5. 11:59
필자에겐 친구가 많지 않다.

성격적으로도 문제가 있거니와 오늘할일을 내일로 미
루지 아니하면 우주의 순환고리를 끊어내는 일로만 여
겨지는, 짧게 말하자면 게으르기 짝이 없는 인간인지
라 폭넓고 활발하게 교우관계를 넓히는 일은 아마도
일평생 요원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필자에게도 두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모이는 모임
이 있다.
두달에 한번 마술에 걸리는 이 모임의 취지는 원정 도
박 모임이다.
필자의 졸고를 주욱 읽어주신 독자들이라면 이미 눈치
를 채셨을 것이다. 도박과 음주에 관한 일상의 얼룩들
을 이미 실토한바 있다.

포카는 아니지만 포카의 족보를 응용한 원카드 게임
을 하는데 정식 명칭은 빅투 또는 까숑이라고 한다고
한다. 나름대로 꽤 집중을 하게 하고 머리를 쓰게 하
고 막판 반전의 묘미까지 제공하는 게임이지만 우리
멤버 말고 이 게임을 안다는 사람은 한번도 들어 보
지 못했다.

그렇다면...왜...


왜 우리는 여기에 미쳐 있는가...

우리 멤버는 모이면 -한 녀석의 신랑과 또 남자친구
가 있을때는 남자 친구까지포함한- 밤을 새면서 한번
은 광주로 한번은 인천으로 또는 서울로... 각자 키우
는 가이새끼까지...총출동을 하곤 한다.


그들이 모여 밤을 새며 하는 것은 도박만이 아니다.

인생을 살면서 인생의 목표가 성공이라 해도 성공만
이 삶의 전부가 아니듯이.. 밤을 새워 도박을 하고 돈
천원에 핏발을 세우는 도박판에서도 로티플에 포카를
잡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

삶을 윤택하게 하고 지혜와 용기를 주며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대 형성을 통해 뿌리 깊은 우정을 다
시한번 확인하게 해주는 그것!


수다!

우리에겐 에이스 한장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그녀의 시어머니의 일상에 대한것...
그녀를 버리고 떠난 몹쓸 어떤 놈에 관한 논의...
그녀의 남편과 1주일전에 벌어진 거실에서의 언쟁에
대한 각자의 소견을 피력하는가 하면
인생역전 대박을 맞고 어느날 갑자기 사직서를 쓰고
떠난 옆사무실의 남자직원에 대한 걱정,
14년의 연애 끝에 한여자와 결혼을 하는, 그럼에도 불
구하고 아직도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설렌다는 한
후배녀석의 꿈같은 이야기에서부터 악독한 시어머니
에 바람피는 남편까지 여자인생은 뒤웅박 팔자임을 여
실히 보여주는 한친구의 친구에 관한 걱정까지....

그녀들의 남걱정은 새벽닭이 울고 옆집 남자의 출근
하는 구두소리가 돌계단에 울려 퍼질때까지 계속 되
고 또 계속 된다.

때론 진심어린 걱정으로 때론 반쯤 호기심으로... 반쯤은 내 얘기에 집중해 주는 관중을 즐겁게 해줘야만 하는 의무감으로 인해 이야기는 점점 미궁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늘 그렇듯이 진실은 저너머에...

그러나.. 정작 나를 허술하게... 쉽게... 가볍게 살게 해주는 것은 친구들끼리 둘러 앉아 그까짓 남걱정 조금 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진짜는... 나를 털어 놓을 때다.
드라마에 나오는 자존심 드높고 지혜로워서 한치도 속내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고결한 향기를 지닌 여인네의 이미지를 갖고 싶은 때가 많다.

여인네가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 가는 최상의 방법이며 숫컷을 미치게 하는 비법중 그 으뜸일 것도 자명한일!

그러나 그 고결한 자존심 지키면서 속으로 삼키고 삼키다가 생기는 후유증중에 가장 고약한게 뭔지 아는가?

눈물을 흘릴줄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울고 싶을만큼 괴로울때.. 울고나면 뭔가 시원 할 것 같은데 울 수 없는 고통...

누군가에게 위로받는다면.. 조금의 경계심도 없는 무방비상태로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보고 싶은데 기대 울 나무가 없는 고결한 얼음기둥이 되어봤자...

남에게 보여지는 고결한 모습과 몇가지 장점들을 빼고는 일평생 후유증에 시달리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

단지 그것 하나... 남에게 보여지는 나의 날카로운 그림자에 대한 자존심을 버린다면 한세상 허술하게 살아지는것? 그거 참 쉬운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때
까마득한 후배가 나를 치고 올라올때
누군가에게 추한 몰골을 보여 놓고 사태를 수습 못하고 속 탈때
시어머니가 꼴보기 싫을때
남편이 바람 피는 듯한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올때
문화적 우월감을 느껴 자랑하고 싶어질때(멋진 공연을 봤다거나...)
실패했을때...
누군가가 실패했을때...
누군가에게 니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이 듣고 싶을때...


아... 수다가 필요하다.

여러분은 지금 이순간 함께 떠들어줄 누군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내어깨를 두드리며 로빈윌리암스처럼 니잘못이 아니야 란 말을 아홉번쯤 해준다면...
그래서... 이쁜 입모양으로 훌쩍거려야 할 필요도 없이 추접스럽게 콧물을 흘리며 울게 해주면 훨씬 가볍게 아침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죽도록 남걱정을 하다가 허리가 활처럼 휘어 바닥을 구를만큼 웃게 해주는 당신의 스파링 파트너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줄이건데, 참된 섹스에서 콘돔은 마냥 거추장스런 방해물이듯이, 참된 대화에서 내세우려는 자좀심 따위는 대화를 싸움으로 만드는 촉매일 뿐이다. 자존심을 거두고 되새기길 바란다. 연인들이라면, 그대들과 마주 앉아 자존심을 서로 상하지 않겠노라고 툭탁거리는 바로 그 상대방이, 당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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