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로봇의 노래

14세 아들의 어버이날 편지

영혼기병깡통로봇 2024. 1. 9. 15:40

 

언제 밥이나 먹자는 막연한 인사가 5월쯤엔 되니 살짝 패턴이 바뀌었다.

주말에 다들 바쁠 테니 6월에나 보자라는 인사는 나이 탓인지 배려인지... 공감하고 있다는 인사 같기도 하다.

니나 내나 고단하긴 마찬가지니 서로간에 1절만 하자라는 암묵적 합의 같기도 하다.

올해 가정의달은 연휴가 두번이나 되어 더 그랬다.

 

좋기도 하고 그래서 더 주말이 숨차게 바쁘기도 한 5월이다.

근로자의날에는 시댁에 다녀왔고 그주 주말은 친정에 다녀왔으며

둘째 토요일은 회사 출장이 잡혀 있고

그다음 주 토요일은 가죽공예 물건들을 들고 플리마켓에 가서 장사를 해볼 계획이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연휴는 완도에 사는 시이모님의 초대에 응해야 할지...

무시하고 공방에 나가야 할지 고민이다.

마지막주에도 안가면 매월 나가는 공방비 20만원은 버리는 셈이니 남편에게 미안해도 고민은 해야 한다.

 

누구보다 이기적인 삶을 사는것이 남은 절반의 삶에 대한 철저한 보상이자 "과제"로 규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5월은 가정씩이나 챙겨야 해서 바쁘다.

애도 없는 중년의 부부가 쉴새 없이 주말이 바쁜 이유는

어느순간 눈떠보니 시속 200KM로 달리고 있더라는 50대의 불안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주말에도 역시나 바쁜 주말의 숙제를 해치우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찍 출근하여 아침식사로 나온 김밥을 잘근잘근 씹으며 뉴스를 끄적이던 어버이날,

 

스쳐지나갈법한 지식인의 한 문장이 나를 사로잡았다.

14살 어느 아들의 편지였는데 내용은.. 사실 대단치도 않았다.

부모님에게 진 빚을 돈으로 따지면 온 우주를 사도 모자라겠지만 그정도로 사랑하고 감사한다. 부모님이 해주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행할 수 있는 아들이 되겠다...는 내용이었다.

 

우연히 마주한 글속에서 우주를 사도 모자란다는 문장에 불현듯 감정이입을 하고 말았다.

게다가 사랑이라는 단어 외에 "심리적 도움"을 주신 것도 감사하다.. 라던가

"행해주신" 이라는 표현을 쓴걸 보니 교회 잘 나가는 친구인가보다.. 하는 감상이 들었던 나는

친구들과의 단톡방에 글을 공유 하며... 이런 편지 받으면 엄마 울지 않냐고 물었다.

 

친구들의 반응은 꽤나 미지근 했다. 어느 포인트가 감동인지...? 등등

 

친구들과 나 사이에는 아주 큰 간극이 있음을 바로 알았다.

나의 친구들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은 현실의 일상다반사중 하나였고

나는 저 문장에서 지난 후회가 빚어낸 몽글몽글한 꽃밭 말고는 일상의 경험이 없는 탓이다.

 

한친구는

"이게 뭐 감동이야? 울내용은 아닌데? 돈 써준거가 팩트네!" 라고 말했고

 

조금 고상하게 말하기를 좋아하는 친구는

"맘의 선물인 편지가 젤 좋은 선물이라는 말은 이제 안하려구요" 라고 말했다.

 

내 친구들은 지난 2~30년에 걸쳐서

어린이는 몇살부터 몇살까지 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자녀에게 선물의 정의와 정성의 무게에 대해 가르쳐야 하른 어른의 책무에 대해

중요한 의사결정을 해왔던 으른들이었다.

 

나는 오래 고심하고 본인의 마음을 잘 들여다 보았다가 생각을 하나하나 정리하여 문장안에 담백하게 녹여낸(내가 과하게 오버해석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14세 남자아이의 어휘와 문장에 대한 놀라움을 전하고 싶었으나

끝끝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문장에 대한 거였어..라는 말은 차마 하지못했다.

 

문장이 뭐가 감동적이냐고 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대단하게 잘쓴 문장도 아닌데 또 엄마들은 학원 숙제검사하던 지난밤처럼 문장력을 평가할지도 몰랐다.

그녀들에게 나의 감상에 대해 설명을 했다가는, 글을 잘썼다기 보다 14살 남자 아이가... 쓴 문장이 신기했던 거라구.. 내말좀 이해해줘 친구들아... 하면서 울고 있을 내 처지도 암담했다.

그녀들은 결국 철없는 것아... 가서 돈이나 벌어오렴.. 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어버이날 아들이 엄마에게 편지를 쓰다" 라는 팩트와 사건의 전개따위는 모르겠고

14세 중학생 남자아이가 우주를 사도 모자란다는 표현을 편지에 썼어... 어머 왠일이야... 라며 호들갑 떨던 나는 뭘 잘 모르는, 뇌가 꽃밭인 상태였던 것이다.

 

나의 청소년 시절도 딱히 달달하진 않았다. 14세였던 나는 엄마에게 편지 대신 주머니에 있는 푼돈을 짜내어 싸구려 브롯지를 샀고 간혹 언니와 돈을 모아서 장갑을 샀다. 엄마 입장에서는 온통 쓰레기가 아닌 것은 없는 선물이었을 테지만 마음을 담은 무언가를 해보진 못했다. 40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조금 상황이 나아졌을 뿐 엄마에게 줄 나의 최선은 돈봉투 말고는 달리 없다. 간혹 근사한 외식이나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는 것 정도의 이벤트가 있다. 엄마도 그랬다. 마음은 사랑을 원해도 현실은 봉투를 사랑한다.

 

그런 주제에 나는 고작 문장 하나에 호들갑을 떨어 놓고 나이를 먹었고 또 마음이 여유로워져서 그랬나보다라고 변명을 한다. 약간의 후회... 약간의 자위, 위로 같은 순간이다.

 

그러니 오늘 또 깨닫는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순간들이다.

모두가 다르게 이해하고 다르게 받아들이는 그 순간들은 모두 내것이다.

오늘 나는 친구들의 철없는 수다속에 감춰진 엄마의 위엄을 마주한 낯선 경험에서 나의 결핍을 발견 하는 대신 다른 형태의 삶을 건져내어 어루만져 본다.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어른으로서 해야하는 결정, 어른의 결정과 사람의 결정 사이에서 깊은 고민과 선택의 통증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나는 내 삶의 모든 순간에서 온통 나에게 집중했음을.

덕분에 나는 지금도 지독하게 불안하고 두렵지만 그 또한 내가 매순간 나자신의 마주하고 있시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내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현실대신 문장에 감동하는 철없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이 작은 순간에 다름을 발견하였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순간에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삶을 채워간다. 그렇게 나는 멈춰 서있지도 뒷걸음질 치고 있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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