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로봇의 노래

티타늄할배와 막내딸

영혼기병깡통로봇 2017. 8. 23. 13:05

사직서를 일찌감치 던지고

퇴사하면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한다.

신난다!


고전문학 '다시' 읽기
집에 있는 책 모두 읽기
주3회 요가
주2회 수영
주 2회 강아지와 탄천 걷기 

해외 여행 가기

1인창업 사업제안서 만들기(정부에 눈먼돈이 많다길래)
코엑스 각종 박람회 유람하기
박물관 / 미술관 격주 1회 방문
격주 1회 국내 당일치기 여행가기
만렙만들기
현주랑 용진이랑 자주 놀러 다니기

라는 거창한(별로 거창하지도..!!) 계획을 세운바 있다.


결론적으로 백수 1.5개월 만에 순전히 돈이 필요해서 일을 시작했고
퇴사 4개월만에 꿈은 꿈일 뿐이라며 직장생활을 시작했더랬다.
그래도 채용해줘서 고맙고, 입사해야 해서 더러웠다.

차라리 백수계획을 세우지나 말 것을...
꿈도 야무졌다.

어쩌면 한결 같이... 변함 없이 내 발목을 잡으실까.. 아버지는!!

이라는 생각이 4개월 동안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백수 계획을 수립하던 그 주에 아버지는 입원 하셨고 입사하는 전 주에 퇴원 하셨다.

척추에 염증이 생겨서 척추 사이에 티타늄을 박고, 아버지는 아이들처럼 엉엉 울었다.

마약과 다름 없는 진통제 주사를 맞고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아서...


아버지는 그렇게 8시간에 걸친 수술을 두차례 받으셨고
나는 터키여행을 접었고 
백수 1.5개월 만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내나이 마흔 살의 일이다.


아.. 그 이전에, 그보다 더 10년 전 서른살이 되던 해,
그때도 역시 삶이 너무 고단했던 나는... (난 참을성이 없나봄.. 언제나 힘듬)
앞으로 나의 사회적 가치에 대해 고민이 바닥을 쳤던 나는... 
그래서 힘들었던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던 나에게 무엇이 있었냐면...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심장이 고장 나서 대수술을 하시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땐 아마 돼지판막을 심장에 넣었더랬지...

그리고 불혹을 맞았고 또 힘겨워졌고 쉬고 싶었지만 서른살의 나와 조금 달랐다.
자학과 고통의 비릿한 맛은 여전했으나 그래도 한발 물러서서 나를 내려다 봐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죽을 듯이 괴롭진 않았던 데다가 
다행히 어렵게 구한 남편이 있어서 나도 기생충 처럼 살아 보겠다는 야심을 어마 무시하게 계획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나의 숙면을 방해 하는 아버지가 있었던 거였다.
그 때 나는 정말... 화가 나있었다.
화가 났다. 
이 모든 일들에 화가 났다.
후배가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게 잘 견뎌?
난 지금 죽을 것 같은데...

담담하지 않았다고... 죽을 것 같은게 아니라
죽일 것 같았다고...

그러나 마지막에는 견디는 수 밖에 없지 않겠냐고 말할 밖에...

그래서 나중에서야 사실은 화가 났'었'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견뎌 냈기 때문일 것이다.

눈은 도자기로 만들어진 그저 그런 차이나 할배였다가
어느날엔 남의 심장을 달고 사는 돼지펌프할배로 업그레이드 하더니
그 10년 후엔 척추에 티타늄을 박은 티타늄 할배가 되었던,
인조인간101호 티타늄할배 이치우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어이없고 난처하게도,


이제 세상에 없다.


어제 회상곡을 참 구슬프게 읊조리시던 스님과 함께 아버지의 옷가지를 태웠다.

이젠 정말 가셨나 보다.


47살이나 먹은 막내딸은

이제와서는

울자니 뻔뻔하고

웃자니 한심하고

화내자니... 안계시다.


안계시다.

안계시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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