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로봇의 노래

박치기왕 김일.. 그 영원한 전설을 위하여

영혼기병깡통로봇 2004. 5. 26. 02:33

김일..
흑백TV조차 마을에 몇 없던 시절...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주던 그 김일 선수가 일본에서 있었던 은퇴식에 이어 고국에서 가졌던 은퇴식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다.

 

그때 스포츠 관련된 사이트를 운영하던 나에게
김일 선수의 은퇴식을 추진하는 운동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취재를 올 수 있냐는 전화였다. 당연했다. 취재차가 아니더라도 반드시 가야 하는 자리에 기자석을 내어준다니 우리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사인에 눈먼 깡통은 그의 사인이라도 한 장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종이?? 볼펜?? 아니다. 그의 위대한 이름을 한낱 종이쪽지에 적고 싶지 않았다.

일찌감치 동대문에 가서 하얀 면티 두장을 샀다.

하나는 동행한 overline군것까지...건강이 좋지 않아 사인을 받지 못할 지도 모르니 안되면 그냥 우리가 입자는 생각으로 장충 체육관을 향했다.

아련한 향수가 묻어나는 장충 체육관...
그곳에서는 깍두기 머리를 한 건장한 청년들이 검정 양복을 입고 진을 치고 있었고, 그 와중에 추진본부의 직원이 우리를 반겨 주며 지난번 명예의 전당에 좋은 글 올려 주어 고맙다고 했다.

이참에 그에게 사인을 받을 수 있게 주선해 줄 수 있냐는 간곡한 부탁을 했다.

하지만 역시나 거절 당했다.

잘못하면 건장한 청년들에게 걸려 뼈도 못 추릴 분위기인 터라 다음에 건강이 좋아지시면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겠다는 약속만 받은 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까지는 눈물겨운 투쟁의 서곡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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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어설픈 조명과, 무너져가는 장내 시설들 속에 그리 많지 않은 관중들이 들어 오기 시작했고 오프닝 게임이 시작 되었다.


오프닝은 여자 레슬링 선수들의 게임이었다.

 엽기적인 분장과 의상의 선수들은 김일 선수의 현역시절보다는 역시 쇼적인 면이 많이 보이는 것 같았다.

미국의 프로레슬링이 유행 하면서 그들이 보여주는 관중의 즐거움이 많이 받아 들여진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다음은 모 은행의 지점장으로 있는, 머리가 조금 벗겨지기 시작하는 중년의 남자와 한 선수의 게임이 계속되었다.

낮에는 화이트 칼라로, 밤에는 프로레슬러로 링 위에 서는 그의 모습이 마치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연상하게 했다.

또한 이게 우리나라 프로레슬링의 현주소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선수와 일본선수의 더블매치가 계속되었다.
일본 선수들은 너무나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관중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게임이 아니라 이벤트와 퍼포먼스라는 듯이 관중들을 의식했고 그들의 환호성을 받기 위해 많은 액션을 취하기도 했다.

 

관중들 중엔 각 통신사의 레슬링 동호회도 있었는데 그들의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레슬링의 진정한 묘미를 알지 못했던 나 역시도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면서 흥분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보면 스포츠의 힘 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오프닝 게임이 끝나고 많은 기자들(각종 언론을 비롯한 방송사들의 치열한 취재전쟁의 현장이었습니다.)이 선수들이 들어오는 출구에 갑자기 떼거지로 몰려들었다. 식순상 김일 선수의 은퇴식이 시작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도 거대한 방송용 카메라들 틈에 끼어 그의 등장을 기다렸다.
엄청난 몸싸움을 견디면서 자리를 잡는 피나는 사투를 하고 있을 즈음에 운영자 측에서 사인을 보내왔다. 김일 선수는 한시간 후에 나올 것이니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흠....기운 빠졌다.

 

어울리지 않는 댄스그룹의 공연과 가창력 뛰어난 여가수의 공연이 끝나고 김일 선수의 다큐멘터리가 시작될 때 쯤 취재진들은 다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가 MBC의 중계방송이 시작 되는 것이었다.

아나운서 이윤철씨가 사회를 맡았다.

 다큐멘터리가 방송되는 동안 담배를 피우거나 자리에 앉아서 수다를 떨던 취재진들은 갑자기 다시 몰려 들었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나.


그리고 천천히 등장하는 김일선수...필자는 아무 말도 아무런 몸짓도 할 수 없었다.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 움직이는 김일선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정말 화가 나는 것은 엄청나게 뿌려대는 드라이 아이스와 요란한 폭죽소리를 연출하는 쇼쇼쇼였다.

 

 왜 근엄하고 아름답게 지켜봐야 할 그의 은퇴식을 쇼무대로 만드는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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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된 식순이라면 김일 선수가 링 위에 올라가서 자리에 앉고 화환을 전달하고 김일선수의 오랜 친구인 루 테즈가 전달하는 WWA회장 임명장을 받고, 다시 화환을 전해준 뒤 후계자 이왕표선수에게 가운을 입혀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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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화환을 전해주고.....

 

그런데 이윤철 아나운서가 처음에 대본을 보지 않고 애드립으로 진행하기에 역시 프로는 다르다라고 생각 했는데 그게 제대로 된 대본을 전달 받지 못하고 현장에 급히 도착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갑자기 "예 그럼 이제 내려가 주십시오"

하는 아나운서에게 진행자가

"아직 가운을 안 입혀 줬는데요?" 한다.

가운을 입자 다시 내려가라고 한다

...화환을 전달해야지요...


우왕좌왕 대충대충 식을 진행하고 나도 나중에 방송될 때는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오겠지 하는 생각에 미치자 이게 은퇴식이 아니라 싸구려 예식장에서 15분 동안 진행 되는 결혼식을 본듯한 느낌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도저히 몸싸움에 밀려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자 당시 동행했던overline군이 생쥐처럼 덩치 큰 취재진들을 헤치고 링 위로 기어 올라갔다. 당시에는 처절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링위로 매달려 올라가는 overline군의 뒷모습이 좀 우습긴 했다. (고생했다...)


온갖 몸부림 끝에 링 위로 올라가서 사진을 찍고 거지꼴을 하고 내려온 우리의 overline군과 함께 뒤에 서서 취재진들을 보니 갑자기 생각이 다른 곳에 미쳤다.

 

이렇게 많은 메이저 방송사들이 이렇게 훌륭한 장비로 취재를 하는데... 우리가 찍는 사진 보다 훨씬 좋을 텐데...이미 만들어진 그림을 찍어 대는게 무슨 의미 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들이 만든 쇼에 우리가 꼭두각시 역할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똑

같은 그림을 찍어서 우리 사이트에 올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카메라를 들이 대고 "만들어진 쇼"인 은퇴식을 찍어대는 것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김일 선수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뛰쳐 나왔다.

영문 모르는 overline도 함께 뛰었다.
다시 한번 깍두기머리 청년들과 대적을 해서 반드시 김일 선수를 만나와 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추진본부의 그 직원을 찾아가 통사정을 했다.


"사실은 사인 받으려고 동대문에서 티셔츠를 사왔다. 매직을 파는 데가 없어서 동대문 바닥을 뒤집고 다녔는데 우리는 김일 선수를 꼭 만나야 한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 직원은 "그럼 나는 빠질 테니까 들어가서 한번 직접 말씀 드려보세요" 한다. 그게 어딘가.


깍두기들을 헤치고 VIP실로 들어갔다. 역시 취재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취재진들이 카메라를 접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김일 선수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혹시 기억하실 지 모르지만 전에 같이 취재한 적도 있구요...명예의 전당이라는 코너에 선생님 글을 올린 적도 있는...인터넷의 ..후추라고 기억하세요?"

 

역시나 잘 기억을 못하시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이렇게 ..."

 

하며 악수를 청하시는 것이다. 악수를 했다. 김일 선수와...


정신이 혼미해 지는 것을 가늠 하면서 너무나 죄송하게도 사인을 청했다.

주섬주섬 가방에서 옷을 꺼내면서

 

"선생님 사인 한 장만 해주세요"...


한참을 쳐다보시다가 옆에서 거동을 돕는 남자에게 티셔츠를 잡으라고 했다.

 

 사인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적인 일이다.

김일 선수의 40년 선수생활을 마감하는 은퇴식에서 유일하게 사인을 받은 사람이 

 

 나인 것이다.

 

카메라를 접던 취재진들이 갑자기 동작을 빨리 하면서

 "야 사인한다. 카메라켜!!!"하며 조명이 환해 졌다.

 

그 와중에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셔츠를 잡고 선생님이 힘겹게 한자 한자 쓰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美德은 良心에서
전 世界 참피온
金一

20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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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가보다 ^^

 

선생님... 건강하세요…


정말 건강하시란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었다. 너무 이기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우리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늘 건강하게, 그 자리에 건재해 주셔야 한다.


어린시절 흑백TV로 레슬링 중계를 볼 때마다 무릎에 나를 앉혀 놓고는 엉덩이가 들썩들썩하도록 박치기에 흥분하시던 아버지.

지금은 늙고 힘없는 지친 얼굴을 하고 계신 아버지가 언제나 마음속에 자리하여 살아가는 힘이 되는 것처럼

힘든 시절을 견디어온 우리의 아버지들에게 그는 언제나 마음의 기둥일 것이다.

선생님 건강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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