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로봇의 노래

낙태에 관한 토론의 기억 ^^

영혼기병깡통로봇 2004. 4. 8. 09:04

찬성진영:

현실적으로 현재 직면한 사생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무시할 수 없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위해 엄마가 어디까지 방패가 되어 줄 수 있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현재 가장 고통받는 사람은 태아보다 여성이다.

여성의 권리가 더욱 중요하다.

사적인 인생의 문제에 대하여 법으로 규정될수 없다.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나왔지 신으로부터 나온것은 아니다.(신앙자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되었으나 의외로 차분함)

여성문제의 한 부분이다. 여성은 타인의 압력에 의해서 원치 않는 아이를 출산했을때 인생에 대한 좌절을 가질 수 있다.

생명의 애매성 - 어디까지 살아 있다고 볼것인가.

                        인간이 존엄성을 갖는 시작점을

                        과연 태아부터라고 규정할 수 있나

기형아라도 낳아야 된다. 반드시 낳아야 된다. 라는 명제에 대해 본인이 직접 고통을 겪어본적이 있나 의문이다.(어머님의 임신중독으로 백색증으로 태어난 후배의 발언이다.)

결혼을 한 상태에서도 실수를 한 것인지 미혼모인지에 대해 법적인 규제에도 인간적인 융통성이 존재해야 한다.

수잔브링크를 봐라.. 아이가 부모에게 짐이 된다.

고아를 수출이 계속되고 구제할 수 없는 인구가 증가된다.

 

반대진영:

인간은 생성초기부터 존엄하다.

인간은 인간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가지지 않았다.

임신하게된 동기부터 스스로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심각한 여성문제의 소지가 있는 발언이었으므로 청중 동요함)

성생활의 문란을 야기할 뿐더러 생명에 대한 존엄성의 기초가 무너질 수 있다.

지금 당장은 불합리 하다고 생각하는 여성도 많지만 장기적으로 볼때 낙태를 방치하는 것은 인류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일이 될 수 있다.

생명에 대한 존엄성 뿐만 아니라 성에 대한 개방과는 또다른 문제가 있다.

인간의 성관계가 주는 감정의 교류가 책임은 전혀 없는 쾌락일변도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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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서 책을 찾다가 예전 대학시절의 노트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산업심리학이었던가 사회교육방법론이었던가... 아마 수업시간에 했던 토론의 기록이었을 것이다. 그날 내가 기록 담당이어서 그당시에 발표자의 이름과 얘기들을 날아가는 필체로 정리한 노트다.

지금보니 뭐라 적혀 있는지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ㅡ.ㅜ

간만에 이름들을 보니 얼굴도 떠오르고...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 이름도 있다.

그리고 나에게 여름방학때 러브레터를 보냈던 컴공과 선배이름도 눈에 띈다.

ㅎㅎ 지금은 뭘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결혼해서 아이도 있겠지..

 

아직 미숙하던 시절의 토론이었으니 사실은 티비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본인도 확신하지 못하는 의견, 더 재미 있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얘기를 예로 들으면서 심각하게 토론이라는 것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 했던 미스터 맘마.. 였나.. 그 영화도 예로 들어서 설명한 학생도 있다.

 

아뭏든 그당시에 강간이나 기형아의 출산에 대해서도 무조건 낙태를 반대하는 것은 여성을 두번죽이는 일이라며 울분을 토했던 수업이었다.

 

지금의 나는 아마 그런 토론이 있으면 어떻게 할까 모르겠다. 아마 드라마를 보러 종종걸음을 재촉하지 않을런지...

 

예전에 직장생활 3년차 쯤이 었던 것 같다.

나는 아직 대학시절의 젊은 피가 식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사보편집기자하나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나와 동갑이었고 나와같은 시기에 대학을 다녔다.

그녀는 어느날 학교 다닐때 학생운동을 하던 선배가 찾아 왔는데 자기에게 정수기를 팔더란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울분을 토했다. 자기는 학교 다닐때 학생운동하는 애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뭘알것이며 자기들이 그렇게 화염병을 던져서 바뀌는 게 무엇이냐... 그리고 봐라.. 지금 정수기를 팔고 있다. 정말 진심으로 자기가 원해서 학생운동을 한거였으면 지금 그렇게 아주 속속들이 물든 장사꾼이 되어 있을리가 없다... 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녀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광주학생운동의 힘을 모른다. 그녀는 역사시간에 배운 동학운동의 진의도 모르지 않을까..386세대들이 거리에서 피를 흘리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광주민란이라 불리워지고 있으며 남산엔 아직도 안기부의 지하실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마치 누군가 앞에 나서서 바꿔주시오라고 말했을때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채 무릎에 피멍이 들면 그녀는 아마.. 결국 너 그럴줄 알았어. 니가 뭘 하겠니..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가 바꿔주시오 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군중이 알게 되는 일의 힘을, 바꿔주시오 라고 말한 이유에 대해 군중이 생각하기 시작했을때 갖게되는 힘을 영원히 모를 꺼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그녀가 국회앞의 촛불시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는 부질없는 짓을 하진 않는다.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학시절에도 나는 늘 회색분자였으나 지금은 더 많이 사회의 변화에 무관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무릎에 파스붙이고 휠체어 타고 나온 추다르크를 보면서도 걍 웃기만 할뿐 더이상 광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날의 토론중 과거에 해외입양된 아이들은 심장이식수술용으로 팔려가기도 했다는 얘기를 하는 친구도 있었다. 사회과학 서적이라는 빨간 딱지가 붙은 책을 열심히 읽던 시절 나도 그 얘기를 다룬 책을 읽었다.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얘기해주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나도 그 진실이 필사적으로 궁금하지도 않다.

 

그녀도 나도 이제는 국회앞의 촛불을 보면서 조금은 마음이 뜨거워 지는 것으로 안도의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