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로봇의 노래

고벌렁릴라양이와 빈홍이의 이십년

영혼기병깡통로봇 2005. 10. 28. 11:44

고등학교 1학년때 였던 것 같다.

"고벌렁릴라양이" 라는 별명을 가진 내 오랜 단짝친구와

(당시 나는 언제나 주머니가 가난 하여 "빈홍"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민형이라는 이름하고 살짝 비슷한 발음인데다가 가난할 빈, 넓을 홍... 정말이지 그 당시 나는 대단히 폭넓게 가난했다.)

 

오랜 단짝친구의 정말 오래된 초딩시절 같은반 남자친구들과

어린이 대공원에 놀러 갔다.

한겨울에...

 

나름대로 멋을 부리느라 타이트한 기본 스타일의 스커트와 단화를 신고

친구도 만만치 않았다.

 

중곡동의 어린이 대공원에는 눈이 질척거렸다.

발도 시렵고...

친구는 초딩친구들이니 편했겠지만 어린마음에

나는 어찌나... 어찌나 정신이 사납던지...

 

그리고 늘 변태같은 짓거리를 해놓구 사람들에게

떨벌리기 좋아 했던 나와 벌렁릴라양이는 그날도 어김없이

했다. 바보짓을...

 

주머니에 돈이 몇백원 있었던것 같다.

그리고 각각 회수권 한장 씩...

학교에서 월말이 되면 학생용 회수권을 살수 있는 종이를 나눠주었다.

그걸 가지고 매표소에 가면 10장이 다다닥 붙어 있는 학생용 회수권을

샀는데 그 회수권이 아마

그때 120원이었던가... 잘 기억이 안나지만.. 그랬다.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걷어서...

그리고 회수권까지 모두 걷어서...

 

가게에 들어갔다.

용감한 내친구가 가게에 들어가서

주인아주머니에게 회수권과 새우깡을 바꾸자고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지 않았을까..

그땐 몰랐지만...

 

어쨌든 우리의 거래는 성공적이었다.

마치 안드로메다행 은하철도999의 마지막 티켓 같았던

꼬질꼬질한 회수권을 몽땅 건네주고

 

우리는 새우깡과 빼빼로 하나씩을 얻었다.

새우깡과 빼빼로...

 

그리고 중곡동에서 부터 청파동까지

주구장창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참으로 멀고도 험했더랬다.

겨울이라 날도 일찍 저물었다.

땅거미 내려 앉아 어두운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쥐색 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걷는

여고생이란

 

명동 한복판의 리어카들에서

땅콩과 건포도를 한줌씩 쓸쩍 (ㅡ.ㅡ)해서는

까르르 웃어가며 거리를 활보 하던 우리는...

 

지금 생각엔 헌집 벽털어내듯 맞을 뿐만 아니라

엄마한테 걸렸으면 아마 그 무시무시한 한겨울의 꽁꽁언 호스로

죽도록 맞기 권법에 걸려 주화입마에 빠져도 싼!

어이없는 짓이었지만...

 

뭐 어떠랴...

우린 사춘기가 시작되거나... 끝나가거나...

아뭏든 그 언저리를 서성이던 귀여운 꼬마였거늘!

 

예전에 우리 엄마는 집에 손님이 오시면

깨깟하게 세수를 시키고 언니랑 똑같은 옷을 입혀서 쪼로록

앉혀 놓기를 좋아했는데

대통령도 그랬나 보다.

 

88올림픽때 외국인 손님들에게 이쁘게 보이기 위해

거리의 리어카들을 일제히 단속하는 바람에

명동 한복판을 가득 메웠던

떡볶이, 오뎅, 땅콩, 건포도.... 기타등등의

리어카들이 한동안 자취를 감췄더랬다.

 

요즘에야 다시 시끌벅적 하기 시작했지만

품목들은 많이 바뀐 것 같았다.

조금 단가가 세졌다고나 할까 ^^;;

 

명동에 나가면 그날일이 생각이 난다.

아마 나에게는 아주 큰 사건이었나 보다.

 

춥고 손시렵고 콧물을 찍찍 나오고... 언니한테 빌려입은

스커트는 무릎에서 감기고

어설픈 흰색 머리띠는 자꾸 흘러내리고

처음보는 남자애들하고는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 와중에 통이 빙글빙글돌아가는 다람쥐통이라는

놀이기구를 타고 괴로워 하던 16살 깡통이..

빈홍이라는 별명에 걸맞는 거리활보로 깔끔하게 마무리 했던

어느 겨울날의 깡통이..

 

적당히 밀고 땡기기와 구슬리기와 강수두기의 강약을 조절하는

미묘한 줄타기를 초절정 치고빠지기 전법으로 구사하며

어린 놈의 가슴에 불을 화악... 질러 놓았나 보다.

음...

왜 그랬을까...

대체 왜?

고맙긴 하지만 자꾸 걸린다.. 왜??

 

질러 놓긴 했는데

이 불을 꺼야 할지... 부채질을 해야 할지..

 

내게도 옮겨 붙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으...

 

연애질은 너무 피곤하다.

'깡통로봇의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CJ 케이블방송 헬로우디 상담원과의 대화  (0) 2006.01.11
가을아침에 꿈에 잠기어  (0) 2005.11.21
최후의 배신자  (0) 2005.10.11
안으로는 못들어가! 절대로!  (0) 2005.09.25
여름 달밤의 궁상  (0) 2005.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