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시간 두시간가량 버스에서 잠이 들었다.
새벽에 내린 비로 거리는 찬기운에 스산했고
버스는 침묵을 가득 싣고 도시로 내달렸다.
지난 여름, 폭풍과 소나기에도 온전히 잎을 지켜냈던 은행나무들은
고작 시간앞에... 맥없이 거리로 스러져 가고 있었다.
거리의 가을은 그렇게
꿈속에서도 가을이었다.
그리고 잊혀졌다고 믿었던 친구가 나타났다. 어이없게도.
나는 그녀들이 보고싶었는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그녀들은
그시절과 똑같은 얼굴과, 그시절과 똑같은 말투였지만
어딘지 다른 기분이 들었다.
세월이 고스란히 겹쳐진 어린 얼굴이란... 그리움위로 내려앉은 그늘같은 거였다.
보고 싶었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향기롭지 않은 것은 없지만
10대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들과의 시간만큼
향기로운 시절이 또 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나서서
그네들과 차한잔 나누기를 서두르지 못하는 것은
역시나 그리움 위로 내려앉은 삶의 그늘이
발목을 잡는 까닭이다.
지금 내가 아니, 우리가 내가 서로 보이지 않는 어느 공간에서
통장에 찍힌 숫자만큼 하루를 쪼개고
회색신사의 꼬임에 빠져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며 그렇게들 살고 있을 테지만
그 시절의 기억만큼은
꿈속에서처럼 고스란히, 통째로 가슴 한구석에 남아
오늘 혹은 내일.. 어느날 문득 또다시 빗물처럼 상념에 잠겨들 것이었다.
그리고는 또 어느 순간 (아마 올림픽도로 한가운데쯤에서) 꿈은 다른 모습이 되었다.
한참을 저울질 하다 이제 겨우
내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저울을 내려놓았던 사람이
나타났다.
월요일 아침의 단잠이 이렇게 버라이어티해도 되는 걸까..
그의 오랜 기다림을 무기삼아
그의 집안과 학벌과 명예를 방패삼아
지구 반대편 한귀퉁이에 살짝 안착해보고 싶었던
지독히 이기적인 욕심을 겨우 잠재우고
이제 조금 인간다운 평화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나타난 그의 얼굴을 보니
아직 나는 고민을 다 거두지 않은 듯 하다.
그는 10여년전의 그모습 그대로,
주문진의 비도 오지 않는 바닷가에서 체크무늬 우산을 쓰고 뛰어 놀던
그시절 그 모습으로
그 빛나던 친구들 속에서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웃고 서 있었다.
다른 세계를 헤매던 여행자치고는 너무나 정확하게
내려야 하는 정류장에서 눈을 떴다.
마른 웃음이 났다.
입김이 새어 창문이 살짝 흐려졌다. 시야가 흐려진다.
매일 나는 과거를 꿈꾼다.
미래를 꿈꾸며 사는일보다 과거를 꿈꾸는 일이 더 많다.
내일이 즐겁지 않거나 오늘이 즐겁지 않은 까닭일 것이다.
아마 무슨 행복한 일이 닥쳐도 그것이 행복인줄도 모르고 살 것이 분명했다.
예전에 시덥지 아니한 연애를 끝내느라 홍역같은걸 치룰때
하릴 없이 술잔을 기울이던 나에게 "긍정적인 생각"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 해주던 언니가 있었다.
그를 화나게 했던 어느날을 떠올리거나
사람을 잃게 된 일을 자책하며 어떻게 하면 되돌릴까라는 생각만으로
하루를 반복하다가.. 그것도 모자라 머리속으로는
처음은 같지만 끝은 늘 다른 소설을 써대던 나에게
긍정적인 생각이란건 도무지 어떻게 해야 생기는 것인지
참으로... 뜬 구름 같은 이야기였다.
아마.. 그때도 나는 내일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태양은 등뒤에 있었는데... 내일을 향해서는 늘 등을 돌리고
나에게로 부터 생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어둠속에서
지나온 시간에만 미련과 집착속에서 나를 긁어대고 있었을 터였다.
어둠에 신음 하는 사람의 한결같은 미련함이랄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은 잘 모르겠다.
첫눈이 올지도 모른다는 뉴스를 듣고 잠이 들었다가
역시나 가슴까지 한기가 서리는 가을비가 새벽에 잠깐 지나갔음을
알게 되어도 그리 서운하지 않았다.
내년에는 꼭 야간이라도 대학에 들어가고, 다음달부터는 적금통장을 꼭 만들고
크리스마스에는 꼭 해외여행을 가자던 녀석의 약속이
다음달이 되면, 또 다음달...
그다음달이 되면 내년엔 꼭... 이 될 것이 뻔했다.
그래도 실망스럽지 않았다.
밤새 작성한 제안서가 어쩌면 채택되지 않을지도 모르고
혹시 몰라 사장 몰래 넣어 본 이력서가 쓰레기 통에 쳐박힐지도 모르지만
그로 인해 좌절 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긍정적인건가...
아님을 나는 안다.
그것은 아마도 기대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부푼희망이라는 단어는 봄에만 사용 하는 것이거나 20대까지만 사용하는
금지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는 것으로도 긍정적이지 않은가..
그래... 긍정적인 것일 것이다.
긍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해두는게 긍정적인 일일 것이다.
그리 믿자
지금은 아니어도 언젠간 첫눈이 보송보송 내릴 것이며
다음달이나 그다음달 쯤은 그도 미래를 설계할 지도 모르며
제안서따위 300번쯤 쓰고 나면 언젠간 보람이란 것이 생기겠지
그리고 다음번에 연애할때는 꼭 후회하지 않을만큼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하면 되지...
시간이 나에게 그렇다고 가르쳐 주었다.
좌절하건 하지 않건...
그러면 되는 것일 것이다. 긍정적인 하루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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