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로봇의 노래

창덕궁 앞에서 삶을 흔들다

영혼기병깡통로봇 2002. 8. 27. 02:57
삼복 무더위 내내 비가 오더니 처서가 지난 낮기온과 이 엄청난 습도...
집에 앉아 있는것만도 죽을지경인 날씨에 창덕궁앞 편의점 야외 파라솔에 앉아서 땀을 식히고 있는 중이다.

까페라도 들어가 있었으면 좋으련만 주머니에 가진 돈이라곤 1200원이 다인지라 편의점에가서 음료수 하나를 샀다. 웬만하면 편의점안에서 개겨보려했지만 편의점의 에어콘은 후덥지근한 바람만 뿜어내고 있었다.

시간을 메꿔야하는 일이 조금씩 짜증스러워지기 시작할때쯤 꽤 덩치가 크고 빛깔이 좋아 보이는 벌 한마리가 날아왔다.
땀냄새가 나는 탓인지... 내가 섬짓해서 몸둘바를 몰라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접근을 시도한다.
온몸이 굳어서 어쩌지 못하고 앉아 있는 동안에도 머리속에서는 오만가지 잡스런 생각들이 지랄 발광을 떤다.
어린꼬마아이가 벌에 쏘였다가 알러지 때문에 죽는 영화가 생각났고... 영화제목이 생각이 안나서 제목이 뭐였더라를 한참 고민하다가... 나도 알러지 있는데... 이놈한테 한방 쏘였다가 죽는거 아냐... 한방쏘인게 알러지를 일으키면 어떠케 될라나... 볼따구니를 한방 물리면 얼굴이 씨커매질라나... 아띠... 점 죽을때도 쪽팔리지 않게 죽으면 안댈까... 저리가라... 제발 저리가... 가... 훠이...~~

뭐...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엉켜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벌은 침을 한방 쏘구 나면 죽는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얼핏났다. 그리고는 내가 뭐 가미가제의 목표물이 될만큼 그리 대단한 인물도 아니고...지가 뭐 나한테 한맺힌게 많다고 나죽이구 지 죽고... 사생결단을 하겠냐.. 싶은 생각에 조금 안심을 한다.
그리고 "어머 벌이다..." 라고 외치는 모녀가 내 옆을 지나 편의점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급기야 조금 한심하다는 생각을 나름대로 하기시작하면서 피식 웃고 말즈음..
벌은 나보다 나은 목표물을 발견한듯 했다.
음료수병...!!
덥고 짜증나는 마음에 한모금에 빈병을 만들어 놓은 음료수병에서 나는 들쩍지근한 단내를 맡은게다.
녀석을 음료수병을 향해 돌진했다...
좁은 병목주변을 맴돌다가.. 입구에 앉아서 열씨미 주둥이를 씰룩거리더니 과감하게 병속으로 다이빙을 했다.
녀석은 병안에서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미친듯이 날개짓을 하며 병안을 샅샅이 핧고 있는 거였다.
심봤다!라고 외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얻을 수 있는 만큼 얻어가야 할 것이다. 맥없는 날개 두짝과 정말 열받을때 한방에 목숨과 바꿀 비장의 무기하나 들고 험한세상 구경 나왔으니 일단 가질 수 있는 건 다 가져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녀석의 날개짓은 시간이 갈 수록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헛.. 녀석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좁은 병안에서 위로 올라가는 방법.. 들어온 길로 되돌아 가는 방법을 녀석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럼 처음부터 녀석의 수다스런 날개짓이 헬프미..였던 것이었나보다.
병을 살짝 뉘어주었다. 녀석을 호로록~~~ 병을 빠져서 날아갔다.
헐...
방금전까지 죽을 듯이 몸부림치던 녀석은 마치 자궁에서 빠져나와 세상을 대면한 아이처럼... 창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췟... 괜히 뉘어줬나...

병을 가지고 괜시리 손장난을 치고 있을때... 벌한마리가 또 날아왔다.
그놈이다! 날개가 살짝 젖어 있었거니와 장시간 나와 눈싸움을 하던 그녀석이 틀림 없었다.
단물의 유혹을 견디지 못한 것일까... 녀석은 다시한번 음료수병의 주둥이 주변을 선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리 몹시 조심스러웠다. 살짝 살짝 날개짓을 하면서 병안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조금씩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허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 녀석은 또 병속에 홀라당 빠져 버리고 말았다.
ㅡ.ㅡ ... 븅신..

녀석은 또 종전과 똑같은 지랄발광으로 좁은공간을 맴돌고 있다.
어찌할까..
또한번 녀석에게 내밀어 줄까..
뚜껑을 닫아서 걍 생을 마감하게 해줄까... 이러구 사느니 걍 죽어라...

그러나,
녀석에게 전지전능한 God이 되어 보고 싶은 강한 유혹이 뇌를 스쳐지나가고 그 유혹이 신경세포에 퍼져 손을 들고 병을 15도 가량 기울이는 그 순간...
누군가가 죽음에 관한 두려움으로 인해 온몸이 굳어져 오만가지 잡념에 떨고 있는 지도 모른채 "어머.. 벌이다!"라는 무심한 대사를 날리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던 아까의 그 모녀가 나오면서 내손을 엉덩이로 쳤고, 그 때 병은 떼구르르 굴러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 날카로운 조각을 흩뿌리며 괴성을 질러댔다.
벌은... 온데간데 없었다.

11시 출판사 사장과 약속을 하고도 만나지 못하고 숨바꼭질을 하느라 두시간째 창덕궁앞 편의점 파라솔에 앉아 일벌의 무모한 날개짓에 인생을 투영하는 중이다.
나도 녀석과 똑같이 병신짓을 하면서 살고 있을 것이며 그게 병신짓인지도 모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대지의 주인이 되길 갈망하면서 살고 있을 게다.
누군가의 삶을 흔들 권리가 애초에 내게 없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살의를 날카롭게 세운채 아침을 맞는 날이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