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이 그림일기

지상 최대의 쇼

영혼기병깡통로봇 2005. 5. 30. 13:23

 


 

늘 그렇듯이 그날도 막차가 떠나기 직전 가쁜 숨을 몰아 차에 올라탔다.

 

이놈의 짓거리는 언제쯤 끝이 날까

흔히 20대후반의 청년의 찢어진 가죽사이로 습관처럼 폭풍우쳐대는

소셜포지션에 대한 가열찬 포부 따위 잊은지 오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올가미에 모가지를 잡힌채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나는 고속도로에 버러진 비닐 봉투처럼 거센 바람과 거친 호흡에 휘둘리느라

그토록 꿈꾸었던 30대 중반의 여유 따위는 대학시절 일기장 한귀퉁이에 앉은 그대로

노인의 머리카락처럼 희뿌옇게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윤동주의 어느 신부처럼 그렇게..

 

버스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모두 먼길을 가는 사람들이었고 지친 몸을 의탁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늘 그렇듯이 앉자마자 누구 하나 눈치 볼 것없이

서둘러 부족한 잠을 채우기 바빴다.

집에 도착하여 잠을 자더라도 어깨에 뭉친 스트레스 덩어리를

칼질 하듯이 도려내는 것은 불가능 한일,

시간이 될때, 여유가 될때, 아무도 나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저 길가에 버려지는 시간일 뿐인 귀가시간동안

그들은 굶주린 늑대와 같이 잠을 탐하였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나는 작고 불규칙한 소음에 잠을 깨었다.

차안은 어두웠다.

그럼에도 소리는 계속 되었다.

 고속도로를 지나는 버스의 소리와는 다른 소리였다.

인간의 음성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일정한 음율을 지닌듯도 하고

쇳소리가 들리기도 해서 듣고만 있어도 괜히 산소가 부족한 것처럼 숨이 고르지 못하게

되어 버리는, 유쾌하지 않은 소리였다.

 

섣부르게 잠이 깨면 정신이 깨어도 깨어 나기가 싫은 법이다.

자꾸 신경이 쓰이면서도 눈을 뜨지 않고 버티기를 얼마간 하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때 나와 마주친 눈빛은

건너편 자리에 앉은 젊은 남자였다.

남자는 핸드폰을 두손으로 꼭쥐고 한손으로는 송신부를 틀어쥐어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온몸을 구부린채

사력을 다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

무슨일인지 짐작케 하는 시츄에이션..

수화기 너머에는 다소 잠에 취했을, 그럼에도 전화를 끊으라는 말을 차마 못하고

그럼에도 다소간 행복할

어떤 여인이 있으리라.

 

무슨 노래인지 짐작키도 어려운 소음이었다.

최대한 몸을 낮추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입을 가린 손의 일부는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송신부에 방어막을 치고

목소리를 낮추느라 음조차 정확하지 않은,

도대체가 노래인지도 알아 먹을 수 없는

 

그들만의 지상최대의 쇼가 펼쳐지고 있었다.

 

짐짓 모른체 하고 잠을 청하였으나

이미 눈이 마주친 그 남자는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끊는 눈치 였다.

 

나는 미안했고 우스웠다.

그는 쑥스럽고 미안했을 것이다.

그래도 남자는 어쩌면 흐뭇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수화기를 들고 기타를 치며 양희은의 노래를 불러주던 녀석을 떠올렸다.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

 

그녀석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대통령이 되겠다고했던, 결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녀석이라면 어쩌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게 했던 녀석이었다.

한심하고 치기 어린, 나이어린 남자의 허풍이었을 뿐인데 말이다.

 

그들의 연애는 늘상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고

더이상 세레나데 따위는 부르지 않게 되거나 똑같은 세레나데를 어느날

다른 여인에게 부르게 되기도 한다.

 

그래도 어떠랴

시간이 흘러도 누군가는 변함 없이 어느 여인을 위해 세레나데를 부르고

세레나데를 훔쳐 듣던 옆집 아줌마도 짐짓 달콤한 꿈을 꾸게 마련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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