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로봇의 노래

그 녀를 보내며

영혼기병깡통로봇 2009. 12. 29. 18:30

이직을 결심한 사람이 떠나는 것은 회사가 아니라
직장상사를 떠나는 것이다 라는 말에 백번 공감한다.


그녀도 아마 나를 떠나는 것이리라. 내가 그를 떠난 것처럼...

 

아직도 나는 올해 이직을 결심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생겨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생각과 판단의 비교 기준이 될 때가 많다.
그녀의 퇴사통보를 받는 순간에도 그랬다.

 

그 때 최상열씨는 자존심이 더 중요 했었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라는 말 대신에
니가 만약 후회되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없던일로 해주겠다는
뻐꾸기를 날리기도 했다.
그도 나도 자존심만큼은 버릴 수 없었던 지라
그의 속내를 알면서도 모른체 했다.
그는 송별회에서 나에게 자기가 3초를 못참아서 그렇다... 라고 말했다.
어쩌라는 건가...

 

그는 알고 있다.
그가 가진 가벼움을, 근거 없는 나불거림의 한계를, 존경없는 리더의 한계를...

 

그러나 오늘 나도 어쩌면 그와 같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에게 나는 자존심을 내세우고 싶지는 않았으나 무의미하게 잔류를 권하고 싶지도 않았다.
진심으로 그녀의 생각을, 결정을 존중하고 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전해지지도 않은 듯 하다.

 

정말 후회하지 않는지, 나  역시 퇴사를 앞두고 그 마지막 순간에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했지만
가끔 잘 한 짓인지 되새기게 되노라고...
그러니 너는 그러지 말아라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했으면 좋겠다 라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니가 있어주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그리고 나에게 기회를 달라고도 했다. 지금은 내가 어리부리 하지만
조금더 자리를 잡고 상황을 만들어서 니가 힘들지 않게 도와주고 싶다고..
믿어달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하지 않은 것 단 한가지가 있다.

 

퇴사는 받아줄 수 없다. 절대 안된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라.. 함께 끝까지 가자...
라고 말하는 것..

 

그 지리멸렬하고 구태의연한 액션을 취해주지 못했다. 하지 않았다.

 

이유는 백만가지쯤 될 것같지만 사실은 간단했다.
그녀를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가야할 이유가 너무나 명백했고
남아있어야 할 이유라고는 미안하지만 나를 도와줘... 말고는 없어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희생을 강요할 만큼 강건한 왕좌를 갖지 못했다.

 

그녀는 내가 마지막까지 잡아주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잡는 나를 뿌리치는 쾌감을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가 서운한 것은 잡아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잡아주는 나를 뿌리치는 쾌감을 놓쳐서일 것이다.

 

보고 받고 나서 그래도 한번 잡아줘야 서운해 하지 않지라고 말했던 이사님을
떠올리며 쓴웃음이 났다.
그녀의 서운함에 대해 미련두지 않는 나...

 

동시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팔리지 않은 집 때문에 대출을 떠앉고 허덕이다가 오늘에야 계약 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메신저 닉네임을 고민덩어리가 해결되었다는 내용으로 바꾸었다.
아이들이 묻는다.
"고민덩어리란 오늘 휴가내신 그 분인가요..."

 

조금 더 조심해야겠다.
나도 어느 순간 내가 혐오스러워하던 누군가처럼 입이 가벼워지고 있었나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어쨌든 그녀가 남아 있어 주는 것이 좋다.
그녀와의 관계나 조직내부의 문제를 떠나서
그녀가 있으면 내가 일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이기적인가...
떠난다고 하면 손흔들어 주고 싶은마음과
그래도 쟤가 있어야 내가 덜 골치 아플 것 같은 마음을
내안에서 들여다 보며
또 한번 누군가의 얼굴이 둥실 떠오른다. 그사람도 그랬겠거니...
아... 언제쯤 모든 기억에서 벗어나려나...

 

최근 몇년간 회사라는 조직속에서 벌어진 많은 일들을 헤쳐나가면서
내가 변해 가고 있음을 느낀다.


나이 탓인가... 격동의 몇년을 보낸 탓인가.. 둘 중에 굳이 우위를 점치라면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에게 조금더 따뜻해졌고 사람에게 조금 더 냉정해 졌다.

30대의 내가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열정과 노력이었다면
지금의 내가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용기와 결단임을
따뜻한 사람인 것과 미련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인 것이 상반된 것이 아님을 이해하는 중이다.

 

최선을 다해 진실하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인간적인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지만
접근과 시도 자체가 틀리기도 했다.

 

그래도 받아들이기로 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내어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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