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로봇의 노래

주말풍경

영혼기병깡통로봇 2009. 11. 23. 14:29
토요일 아침 9시 30분

눈을 떠보니 오랫만에 창틀사이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서둘러 일어나 간밤에 빨아서 거실에 널어둔 이불을 들고 옥상으로 간다.
민이가 나이들면서 이불에 실례를 하는 일이 잦아 진다.
조만간 비닐을 깔아놓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걸레로 빨래줄을 깨끗이 닦은 후 이불을 넌다.
남편은 쿨쿨 잔다.
옷장을 열어 여름내내 푹 고아진 양모이불과 이불 커버들을 꺼내어 다시 옥상으로 올라간다.

페브리즈를 뿌리니 이녀석들이 겨울 서리바람에 미친듯이 공기중에 흩어지고 말았다.
이불을 꽁꽁 틀어쥐고 동굴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발사!

빨래집게를 꼼꼼히 꽂아 주고 마지막으로 방석과 베게도 옥상에 널어 두었다.

그리고 침대 패드 2개를 더 빨았다.

토요일 아침 9시 반

지난주 공동구매로 구입한 식품건조기에 기어코 육포를 만들겠노라고 어제밤에 사서 재워둔 우둔살 1근
건조기에 널었다.
어제 밤에 말리려고 했는데 울 남편의 어이 없는 행동으로 인해 포기 한 사건...
베란다에서 말리면 냄새가 배니까 빨래 걷으라고 했다. 빨래를 걷더니.. 우리 남편...
빨래를 해야겠단다... 뭐지...
육포를 말리지 말라는 건가... 빨래 왜 걷은 거지...
아뭏든 빨래를 한다고 하니.. 육포 말리기를 포기 했다. 속으로 복장이 터지지만 일단 참자. 난 빨리 하기가 싫으니까...
암튼 일어나자 마자 베란다에 놓아두었는데 아주 잘 말랐다.

토요일 12시
설겆이를 하고 책장을 정리 했다. 아주 오랫만에 숨겨둔 책들을 꺼내 보았다.
남편의 각서가 담긴 시집도 깊이 숨겨 놓았다. 복종을 맹세한 노예문서의 존재를 언제나 불안해 하는 남편이 언제 꺼내어 폐기 처분 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12시가 넘어서 어슬렁 어슬렁 기어 나온 남편에게 아직 덜마른 육포를 주었다. 잘 먹는다.
한근을 눈뜨자 마자 앉은 자리에서 다 먹었다.

토요일 오후 내내 옥상을 몇번씩 오르락 거리며 이불을 뒤집어 주었다.
아직도 퀴퀴한 냄새가 가시지 않은 양모이불을 홀랑 걷어온 남편에게 핀잔을 주자 궁시렁 거린다.

나가서 육포만들 고기나 더 사오라고 시키자 남자의 자격재방송, 천하무적야구단 재방송을 다보고 두어번 더 핀잔을 들은 후에 목욕재개를 하고 차를 갖고 나간다.

차 없으면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우리 남편...

궁시렁 거리면서도 다시 옥상에 올려 놓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남편이 나가고 나서 무거운 솜이불을 다시 들쳐 업고 옥상으로 간다.
어쨌든 겨울 바람은 상쾌하다.
옥상에 같이 올라온 민이도 신이 나는가 보다.

남편이 고기를 사오는 동안 민이를 데리고 산책겸 슈퍼에 가서 고기 재울 양념을 샀다.
어제는 대충 했지만 오늘은 좀 제대로 해볼 요량으로 약간 시든 배 한덩이와 청주를 샀다.

민이와 동네 한바퀴를 돌고 오는 동안에도 남편은 오지 않는다.

양념을 모두 다듬고 즙을 내어 한소끔 끓여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전화만 두어 통 했다.
우둔살이 없다는데 어떻게 해?
아저씨가 사태살로 가져 가라는데?
사태살로 육표를 해도 되는 건가... 모르겠다. 아저씨에게 물어 보고 잘 모르신다고 하면 우둔살로 가져 오라고 했다.
잠시 후에 다시 전화가 왔다.
우둔살이 없다고 했다.... 뻔하지...
우둔살이 없으면 없다고 할 것이지 왜 사태살을 사가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남편은 왜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사태 사가도 되냐고 묻는 건지...
다른 가게 가보라고 했다.
슬슬 짜증 돌입 중이신 남편
여기는 육우가 없고... 저기는 육우가 비싸고 우둔살인지 사태살인지.. 어쩌구 저쩌구...

그냥 들어와... 양념 버리지 뭐... 이를 앙물고 말하자
남편은 정말 그냥 돌아왔다.
그것도 몹시 억울한 표정으로 씩씩 거리면서 돌아와서는 민이에게 짜증을 낸다.
그리고 PC가 있는 책상에 앉더니 또 인테리어 사이트 뒤지기에 매진 하고 있다.
어린 아이 처럼 한가지에 꽂히면 질릴때까지 그것만 하는 특성이 또 발동 했다.
이사 안했으면 어쩔뻔 했어...

그는 과거...

자갈치과자에 꽂혀서 한박스씩 사다 먹기도 하고 오뎅에 꽂히면 아무 양념 없이 맹물에 오뎅을 한봉지 통째로 넣어서 끓여먹는 엽기성을 발휘했다.

개그 하나가 빵 터지면 옆사람이 급기야 짜증 낼때까지 아무 이유 없이 개그를 반복하는 푼수
게다가 다른 사람이 한 개그가 웃기면... 그사람에게 까지 계속 시키기도 한다. 헛...
또해봐... 또해봐 또... 한번만 더... 응응?
과자 사주께 또해봐... 까르르르르르...

암튼.. 울 남편, 지금은 이사에 꽂혀서 주머니에 땡전한푼 없는줄도 모르고 인테리어에 매진 하고 있다.
도배만 한다고 매일 말하는데.. 내말이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나도 말은 도배만 한다고 하면서 TV 쇼핑질에 매진 하고 있다.

슬슬 짜증이 풀렸는지 PC 방에서 기어 나온 남편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냄비에 있는 거 저거 뭐야?
이런...!@#%^%&

그리고 잠시 후에 무릎을 치더니만!!!!
또 이렇게 말했다.

어... 내가 어제 밤에 빨래 왜했지?
우리 육포 말리려고 했었잖아? 나 바본가봐..
라고.. 해맑게....

모르고 그런거였냐?

흠... 이해 할 수 없는 정신세계를 뒤로 하고 이제 낮잠을 강요 한다.

혼자 자게 냅두고 게임에 고고싱...

이제 와우대신 아이온에 올인하는 나...
단지 국산 게임이니까 ㅡ.ㅜ 라며 만이천원을 결제 했다.
흠...
캐릭터도 이쁘고... 디자인도 이쁘니까 뭐...
곽군에게 나중에 아이템이나 달라고 해야겠다..

오후 6시쯤
무한도전을 봐야 하는데 천하무적야구단에 푹빠진 우리 남편
나의 무도 시청이 지난주 부터 남편에 의해 좌절 되었다.
이제 당연히 천무야를 보는 것으로 합의된 줄 생각 하는 것 같았다.

말려 둔 귤껍데기를 폭폭 끓였다. 노오란 진액이 나왔다.
남편이 천하무적에 올인하는 동안 간만에 비누만들기에 돌입했다.
저녁 나절 내내 만들었지만 실패의 연속...
우유를 넣었더니만 비누액의 온도가 갑자기 급상승 하더니
순두부처럼 몽글몽글 올라오기 시작 했다.
어후.. 내일 어느정도 굳으면 다시 녹여서 리배칭 해야겠다.
이래저래 바쁜 하루...

일요일 아침 9시 반

남편은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동물농장을 본다.
어제 만들어 놓은 양념이 쉴까 걱정 되어 일어나자 마자 민이를 데리고 슈퍼로 향한다.
차가지고 멀리 우시장 갈필요도 없이 동네 슈퍼에서도 팔았다.
게다가 우시장 보다 쌌다. 앓느니 죽는다는 말은 이럴때 하는 말이다.

설도 4근을 샀다. 엄마도 가져다 드리고.. 뭐 그런 생각?

호빵도 하나 사서 집으로 들어 오자 남편은 몇근이냐고 묻는다.
4근이라 하니 화들짝 놀란다. 화들짝 놀라기에 나도 화들짝 놀랐다.
어제 남편이 차가지고 우시장 갈때 4만원 어치 사오기로 하고 갔었더랬다.
1근에 9800원이다.

장 봐온 고기를 재워 놓고 떼어낸 기름 부위와 육포 양념을 넣어 떡볶이를 하니 근사한
궁중떡볶이가 되었다.
약간 서운하여 우리 남편이 좋아하는 학교앞 불량식품 스타일의 오뎅떡볶이를
더 해주었다. 우리집에서 유일하게 다시다를 사용하는 음식...
다시다가 들어가지 않고서는 불량식품 떡볶이 맛이 살지 않는다.

오후 2시
종아리가 땡기기 시작한다.
헛.. 뭐 한 것도 없이 어제 오늘 장보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비누만들고, 육포 만들고... 그리고 게임하고..
초큼 바지런을 떨었더니 종아리에 알이 통통 박혔다.
이 저주 받은 물 근육...

쉬엄쉬엄 게임을 한시간씩 하고 있다.
어제 만든 캐릭을 렙 10까지 올려 놓았다.
조금 어려워지기 시작하니 하기 싫어진다. 아.. 파티를 다녀야 하는데..
온라인이나 실제 생활이나 나에게 가장 어려운 건 사람 사귀는 일이며
가장 쉬운 건 개노가다다.
사람을 사귀느니 그냥 개노가다로 연명하련다... 라는 컨셉이 게임에서도 쭉...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개노가다의 단점은 장기간 계속되기 어렵다.
졸음이 몰려 온다. 꾸벅꾸벅 졸면서 노가다로 목숨 연명하다가

5시 30분 게임 칼같이 종료 하여 패밀리가 떴다를 보면서 김주먹밥을 만들어 먹고
어제 만들다 실패한 비누를 밥통에 데워서 조물딱 거려서 다시 만들어 놓았다.

비누를 밥통에 넣으면 어쩌냐는 둥 잔소리를 해대다가
설겆이를 하던 남편은 수상한 삼형제를 보면서 짜증과 광분을 어쩌지 못하고
남편은 결국 9시뉴스와 열혈장사꾼을 본다.

SBS 스페셜을 보면서 아르헨티나산 콩으로 만든 콩기름을 먹으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넓은 초원을 앞마당처럼 트렉터 타고 이동하는 미국의 농부의 스케일에
반해버렸다.

아...
몇주째 집밖에는 한발짝도 나가지 않는 주말 스케줄이 계속 되고 있다.
대천에 가자니 또 돈이 한웅큼씩 빠져 나가는게 두렵고.. 시댁은 그냥 가기 싫고
여행도 귀찮고 영화 보는 것도 귀찮다.

가죽갖고 놀지 않으면 게임하거나, 비누를 만들거나 음식을 하고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수시로 찾아 내고 있다.
은둔형 외톨이로 점점 퇴화해 가는 우리 부부..
이러다 용인 가면 정말 아파트에 뼈를 묻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