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로봇의 노래

새집에서 마지막으로 초절정 궁상 넋두리 한번 살풀이 삼아 해봅니다.

영혼기병깡통로봇 2009. 12. 21. 20:53

지난 주말 집들이는 아니었지만 이사하고 엄마와 이모가 다녀갔다.

집은 휑하니 넓지만 채워진 가구들은 낡고 값싼데다 색도 맞지 않는 것들이 군데 군데 놓여 있는 정도다.
멀리서 보면 그럴 듯 하지만
페인트칠의 마무리, 벽지의 마무리, 싱크대의 마무리... 하다못해 손잡이까지
모든 마무리가 엉성하기만 한 것도 여간 내키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격에 맞추느라 완성도가 떨어지는 동네 미장이를 쓴 티가 여기 저기에서 난다.
제일 싼 벽지로 벽을 두른 것도 보면 볼 수록 눈을 감고 싶어진다.
그래도 남편이 너무 고생을 많이 했다.
마누라 신경질 받아주랴 업체 사람 만나랴... 돈대신 몸으로 해결 할 수 있는 건
우리 남편이 다 했다. 어찌나 무던한지..

엄마는 너무 서두른게 아니냐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직 살던집이 팔리지도 않았는데 이렇게나 많이 대출을 받은 딸년이
걱정되는 마음에 축하한단 말이 쉬이 나오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나도 걱정은 되지만 못할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보다 더 나쁜 상황도 나는 잘 이겨냈으니까...
엄마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엄마,
스무살 즈음엔 빛이 하나도 들지 않는 지하방에서 공동화장실을 쓰면서도 살아 보았답니다.
엄마는 그 꼴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이사하던 그날 이후로 단 한번도 우리집에 찾아 오지
못하셨죠.. 이사하던 날 내 생일이었어요.

직장을 조금 안정 되게 다닐 즈음엔 IMF가 왔구요 그 땐 월세를 못내서
집앞에 숨어 있다가 주인아줌마 잠들때 몰래 들어가곤 했더랬습니다.

옥탑방에 살때는 하늘이 미쳐서 30센티미터도 넘게 눈이 오던 어느 삼월에
밤새 쌓인눈때문에 문이 열리지 않아 창문으로 목이 찢어지게 주인아저씨를 부른적도 있었어요..


증산동 산꼭대기의 지하골방에 살때는 보일러가 터져서
그나마 길에서 주워온 가구들이 몽땅 물에 젖었었던 기억도 새록 새록 나네요 ㅎㅎ

엄마,
TV를 처음으로 사봤어요
50인치 풀에치디라고 합디다.
누군가가 쓰다버린, 한 10년쯤 썼으니 버렸겠죠...
그 쓰다버린 TV를 주워다가 10년정도 썼어요..

완전뽈록화면에 정사각형 궁댕이를 자랑하던 나의 TV와 드디어 이별했어요
당췌 알아먹을 수 없었던 자막도 선명하게 보이고 좋네요
음악프로를 보다가 남편하고 같이
여자애들 그룹이름이 JOT이 뭐냐며.. 기획사 또라이라며 광분했는데
알고 보니 JQT였더라구요..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이랄까..

좋네요...

엄마,
까이꺼 인생 뭐 있어...
내가 살아보니 저지른대로 수습이 되더라
내가 행복하면 되잖아요?


내가 좋으면 그만이다.
그랬다.
나만 행복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 밤,

이모를 데려다 주느라 이모집을 잠깐 들러 이모집의 발디딜틈없이 빼곡히 장식되어 있던
그 화려한 이태리 가구와 크리스털 장신구들을 본 후로는 점점 초라해지는 속물 스러운 마음에
남편에게 짜증을 내고야 말았다.

어쩔 것이냐..
이.. 속물...

 

 

 

잘가라... 고마웠다..
폐기물 스티커를 이마에 붙인 채 나의 뽈록이가 떠납니다.




게다가..... 아직도 내 꿈은 네버엔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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