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로봇의 노래

첫번째 무엇에 대하여

영혼기병깡통로봇 2007. 11. 20. 15:09

11월 19일

첫눈이 왔다.

그저 춥기만 했다.

그래도 첫눈이라는데 아무 생각 없느냐고 묻는다면

뜬금없이 추워졌다가 추워지자마자 얼결에 만난 첫눈이라서...라기보다

워낙에 첫눈에 대한 감흥이 별로 없는 나의 나른한 일상 탓일 게다.

 

보통 첫눈오는 날 결혼을 하다니! 야 잘 살겠구나 라고 억지 인사말을 조작하거나

첫눈 오는데 소주 한잔 할까? 라고.. 어제도 먹은 술잔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것으로 집에서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약간의 죄책감을 덜어내기도 한다.

첫눈 오는데 우리 광화문 네거리를 살짜쿵 걸어 볼까나... 라는 작업멘트도 나쁘지 않다.

역시 첫눈은 이래저래 남녀노소 불문하고 규모의 크기와 상관없이

나른한 일상에 도전하는 스캔들에 불을 붙이게 마련...

 

첫눈이라는 사건이 하나 정도만 있어줘도

이렇게 전국팔도에서 스캔들이 불같이 일어나는데

만약,

뭔가...

처음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건수가 하나정도 더 있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첫눈 오는날, 첫번째 결혼기념일 같은...?

 

흐흐..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였다.

첫눈오는날 맞이한 첫번째 결혼기념일이란건

일평생 누구에게나 단한번 있는 일에

첫눈이라는 유니크한 일이 더해져서

재혼을 수백번 다시한다해도

로또 당첨확률만큼이나 반복되기 어려운,

비록 귀차니즘에 빠져 감동에 대한 반응시스템이 작동정지중인 나에게 조차

뭔가 재밌는 일을 만들면 좋겠다라고 살짝 로맨틱한 생각을 하게 되는...

우주적으로 쇼킹한 반짝반짝 홀리데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평생 결혼은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적은 있으나

첫번째 결혼기념일을 이따위로 보낼거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남편의 든든한 배경이나 시댁의 호화재산에 힘입어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마무리 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따위 가져본적 없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앵벌이 하면서 살지도 않을 것임을 장담했었더랬다. 용감무쌍하게도..

왜냐면 난 누군가에게 폐끼치는것도 싫지만

누가 나에게 폐끼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여기며 살아 왔다.

그게

이나이 먹도록 밤새가며 피터지게 일하는 이유고

2세계획 따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이유고

주머니 찢어지는 이순간에도 노후연금에 목숨거는 이유였거늘...

 

마흔을 코앞에 둔 이 시점에도

난 아직도 야근을 밥먹듯이 하고 있고

내의지와 상관 없이
통장 잔고 2800원이 현실로 다가 왔다.


정신못차리고 방황하며 인생의 전환기를
맞겠노라 사경을 헤매던 서른살.
그 황폐한 2차 질풍노도의 시기에서 배웠던,

세상에서 쪽팔리지 않게 살기 위해 필요한 몇몇가지를 뼈에 새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난 참...
열심히 살았는데 말이다.

 

열심히 사는 것 외에 또 뭐가 필요 한걸까?
외부 공격에 대한 방어능력?
인간관계의 단절?
나의 평화를 방해하는 것들은 다 죽여 버리겠다는 굳은 결심?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비상금 털어 장을 봐다가

나름 특별한 날을 만찬을 준비했다.

 

어쨌든 지금은 이래도

10년을 내다 보면 나보다 오랫동안 경제생활을 할게 뻔하니(이대목에서는 물음표를 찍게 된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한다.)

내 나중을 위한 투자라 생각하며 참는다.

투자가치가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참자.

내 스스로 정한 인생관에 비추어보면 사실 참을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단한번,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스스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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