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에서 우편물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공권력으로부터 날아온 난데없는 우편물에
울렁증이 엄습해왔다.
조심스레 열어본 봉투 안에는
생뚱맞게도 주민등록증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7년은 족히 넘은 소싯적에 잃어버린 주민등록증이...
어느 이름 모를 바른생활 순경나리는
어쩌자고 이제와서 이것들을 찾아 줘야 겠다고 마음먹은 것일까..
음주가무에 정신을 묻은 채 존재이유에 탐닉하던 술취한 인생들이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가고 거리가 고요해질 무렵이면
그네들도 먼지 쌓인 서랍속을 뒤적거리며
속절없는 시간의 강을 거슬러 보긴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인턴사원의 눈물을 목도하던 간밤의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와중인지라
또 다시 지난 시간중 한 뭉탱이가 눈 앞에 툭 떨어져 버린 이 우편물의 무게가 당혹 스럽기 그지 없었다.
대체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일까
간밤,
갑자기 몰아치던 몇주간의 긴장의 끈을 살짝 풀어 놓았던 간밤 내내
나는 기억 나지 않는 그 시절의 일들과 나도 모르는 사이 슬그머니 서랍속에 넣어 두었던,
깃털같은 감정이란 녀석과 숨박꼭질을 하느라 달고도 씁쓸한 밤을 보내야 했다.
그 시작은 한달 쯤이던가 전의 일이었다.
어느쪽에선가 날아온 단촐한 이력서한장과 함께 갓 졸업한 신출내기 하나를 건네 받았다.
어디 어디 졸업.. 이후에는 단 한줄의 경력도 없는,
누가 녹색을 부으면 녹색으로, 파란색을 부으면 바로 파란색을 선명하게 그어낼 듯한 가벼운 종이였다.
어느 줄을 타고 내려왔는지 상관 없었다.
상관 없다.
잔심부름이라도 시켜가며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면서 쾌감을 맛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
키보드 외우느라 베네치아의 적들과 씨름 하던 그 옛날과 달리
그녀는 워드건 ppt건 문서작성에는 거침도 없었고
더구나 인터넷의 문화에 대해서도 그녀가 놀멘놀멘 몸으로 습득한 세월이
우리가 피땀흘려 체득한 기간 만큼이나 길고 익숙했다.
사실 그것보다
베네치아 전투의 참전용사들에게 시대적 불운을 실감케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질문하는 일에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아직도 상사에게 혹은 선배에게 스스럼 없이 질문하고 도움을 청하는 일에
울렁증이 있는 나로서는 부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일이다.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녀에게 곧바로 첫번째 프로젝트의 일부를 떼어 주었다.
방학을 맞아 우리 사이트에서 1년중 제법 크게 실시하는 캠페인의 이벤트기획과 오픈을
책임 지워주었다. 물론 그녀 혼자는 할 수도 없으니 그저 조금 도와주는 수준일 뿐이었지만
스토리 보드 한페이지 끝내고도 환호성을 질러대는 그녀가 밉지 않았다.
집에가서 엄마에게 자랑도 했다는 그녀가 귀엽기도 했다.
그리고 막상 서비스가 오픈되던 날
뭐가 문제가 있는지 디자인과 개발파트에서 아주 간단한 에러하나를 잡지 못하고
식은 땀을 흘리느라 시간은 결국 자정을 넘고 새벽을 달리고 있었다.
팀원 모두가 안절 부절 못하던 즈음에
거짓말 처럼 에러가 해결되고 모두가 서서 카운트 다운을 했고
늘 그렇듯이 서비스가 오픈 되었다.
그걸로 끝이 었다.
수고했어... 자 각자 자리에서 마지막 테스트 하고 정리하고... 집에가자..
라고 말하면 끝이었다.
오픈하자마자 1분도 되지 않아 회원들의
댓글이 십여개가 올라오는 것을 보며 안도의 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그 때,
눈물을 왈칵 쏟는 그녀가 있었다.
오픈 되었다.. 라는 말과 함께 그녀는
어떡해요... 진짜.. 저.. 진짜 감동적이에요..
갑작스런 눈물에 그녀 자신도 놀라 당황해 버렸던 그밤,
당황하는 그녀를 향해 까르르르 웃어 대는 선배들의 놀림과 함께
스물네살 새내기 직장인의 첫번째 야근에서 벌어진,다소 멋적은 에피소드
그녀는 집에 가면서도 진정이 아니되었는지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짜식... 귀엽네.. 라고 그냥 가볍게 넘기기엔
우리 모두 한구석에 치워져 버린 무언가를 기억해버려서 조금은... 아팠다.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동안 잊혀지지가 않았었다.
그래서였다.
아직 그 여운이 다 삭지 않아서
또 다시
경찰서에서 날아온 우편물 안에서 낯선 얼굴을 만나 버린 일이
이렇게도 먹먹해진 것은...
그땐... 이랬구나... 그 보다 훨씬 전의 나는 어땠을까
7년... 10년을 넘어.. 그 이전.. 또 전.. 그전은 어떠했던가...
생각이 생각을 물고 밤을 향해 길게 널부러져 간다.
갓 대학을 졸업하던 그 해
첫직장에서의 첫번째 하루, 첫번째 일주일, 첫번째 한달...
그것들이 어떻게 흩어져 갔는지
그때의 나는 그것들을 어떻게 지나쳐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하려 해본 적이 언제였었나 싶을 만큼 잊혀진 시간들이다.
만져지지 않는 기억들을 방안 가득 흐릿하게 흩뿌려 놓고는
무슨 생각을 하며 여기까지 달려 왔나 하는 생각을
자못 진지하게 하는 척도 해본다.
우린 모두 갑자기 울어 버리는 그녀를 보며 배꼽을 잡으며 웃는 시늉을 했지만
나는 그네들의 뜨거운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우리의 새내기가 돌아간 후 모두 그랬다.
팀장님... 좀..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그래.. 나도 그랬다. 뭔가 잃어버린 뭔가가 갑자기 쿵하고 발등에 떨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다들 뒷말을 차마 다 잇지 못하였다.
뭔가 위로 받은 것 처럼 마음이 가볍기도 했고
잃어버린 따뜻한 무언가를 다신 찾기 어려울 만큼 멀리 왔다는 사실에 씁쓸했고
또 그녀의 오늘이 잊혀지지 않는 행복이었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우린 다같이 자칫하면 따라 울뻔 했던 거였다.
울었으면 우리 참.. 서로 민망했겠지
그래서 그렇게 웃어 댔던 거였다. 웃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밤..
.
그녀에게 앞으로도 쭉 계속될 수많은 밤들이
딱 그 만큼만...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녀가 모르는 사이, 가벼운 울렁증에 흔들거렸던 우리들에게도
오늘의 설레임이
그저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날 중에 하나로 잊혀지지 않게 되길 밤을 도와 기도해
본다고
생각하면
...
좀 쑥쓰러우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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