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로봇의 노래

숙제강박증에 대하여

영혼기병깡통로봇 2008. 3. 26. 11:56

주말동안 몇년만에 놀러온 현주 부부와 인상파 꼬맹이와 함께 스펙타클한 하루를 보냈다.

남은 저녁시간에 TV를 보고 노트를 두권쯤 만들고 때지난 사진들을 구경하다가

밤 11시가 되어서야 보고서를 쓰기 시작해서 새벽 2시쯤 메일을 발송하고 잠이 들었다.

주말인데도 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엄마들이 그렇듯이 우리 엄마에게도 몇가지 레퍼토리가 있다.

엄마로서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나름대로의 포장같은 기억이겠지만

한살때의 밥그릇 요강투척 사건이라던가, 세살때의 비누심부름 사건이라던가, 다섯살 동네골목 가출사건이라던가, 파출소 땅콩 사건이라던가...

 

그 중에서도 재방송 순위로 따지자면 케이블의 무한도전특집 방송 만큼이나 높은 방송횟수를 자랑 하는 야밤 눈물숙제 사건이 으뜸이다.

나도 기억이 있는 일이긴 하지만 엄마는 동일 사건으로 여러건의 전과 기록이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한번의 사건이 엄마에게는 너무나 강렬해서 엄마의 기억속에서 자가분열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공부에 관한 것이니 만큼...!

 

사건인 즉,

엄마가 자다가 우는 소리가 들려서 깨보니 내가 새벽 두시에 울면서 숙제를 하고 있더란다. 초등학교 2학년쯤 이었을 것이다.

숙제 안해가면 선생님 한테 혼난다면서 새벽에 깨서는 혼자 국어책을 썼거나 덧셈을 했거나 뭐 그랬겠지...

낮에 놀아 놓고는 잠도 못자고 그러더라며 엄마는 내가 고집세고 미련맞다고 했다.

 

주인공은 주어진 일을 무슨 일이 있어도 완수해내는 책임감 강한 꼬마가 아니라,

해야할 일을 노는데 정신팔려서 미루고 미루는 주제에 쿨하고 대범하지도 못해서 결국엔 피눈물 흘리면서 후회하는 미련한 꼬마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런거다.

놀기 좋아하는데다 소심하고 미련한 아이의 서른일곱살을 점쳐보라...

해피엔딩일리 없는 ...

 

아마도 주어진 일을 잘 완수해내는 책임감 강한 아이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그 이야기의 결말이,

이름모를 쪼그만 회사의 팀장이 대기업의 나이어린 PM의 눈치를 보면서 일요일에는 꼭 보내겠다는 마지못한 약속을 하고는 일요일 오후에 친구랑 놀다가도 짜증과 우울을 백만볼트의 에너지 삼아 새벽 두시에 보고서를 쓴다거나, 이 시기를 눈치껏 잘 보내면 계약직이라도 대기업의 소속으로 간택되어 신분상승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주제에 짐짓 겉으로는 그 까짓것 필요 없다는 자존심 강한 팀장의 가면을 쓰고 있는, 그런 이야기 이어서는 안되는 거였다.

 

그리고  대기업의 상무께서 친히 그 동안 고생했다고, 잘해보자는 한마디를 전하셨다.

간택받은 것이다.

그거였다.

내가 기분이 엿같아져서 해피엔딩일리 없는 어느 꼬마의

숙제강박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 놓은 이유다.

 

교훈이 가득한 정상적인 성공 스토리는 이런 것이다.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아이어도 상관 없다.

주인공은 고집은 세지만 미련하지 않고 우등생은 아니지만 머리가 나쁘지 않고

성적이 좋진 않지만 꿈도 희망도 목표도 없는 그저 그런 틴에이저는 아니었던,

한마디로 싹수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아이 여야만 한다.

그 아이는 막판 스퍼트를 발휘하여 좋은 대학을 진학하여

좋은 대학에 의례히 있는 있는집 자식을 비롯하여 똑똑하거나, 독특하거나, 개성강한 자식들을

두루섭렵하여 폭넓고 두툼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사회생활의 초석을 다진다.

그것은 고집은 세지만 미련하지 않은 지혜와 자신감에서 오는 프라이드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그 아이는 일찌감치 진로를 정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알고 있다.

그 꿈이란 건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정, 재계에 두루 인맥을 형성하게 되는 동시 통역가,

잠깐 휴식을 취하기 위해 조직을 떠나면 어디선가 누군가에게서 쉼없는 러브콜을 받느라 몸값이 동물원의 코끼리 똥무덤처럼 불어나는 무슨무슨 전문가,

대기업에 입사하여 실력을 인정받고 외주업체, 이를테면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웹기획자들이 바글거리는 중소기업의 나이많은 팀장을 손가락 하나로 조정하는 위치에 있는 대리 라거나,

살짝 고민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각분야의 전문가 list가 내 주소록에 입력되어 있고 그들은 온라인으로도 긴밀하게 이어져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러블리 형라인...

친구의 대부분이 육아에 전념하느라 새로운 메신저 업데이트를 언제 했는지도 기억이 가물거리는 게 아니라...

 

상무에게 나는 감사하다고 말했다.

 

빌어먹을... 그 동안 고생했다니.... 그 동안은 머슴이었음을 인정하는 건가..

썅... 감사하다니... 원하던 거였다는 걸 인정하는 건가

지쟈스...

 

적어도 쪽팔리지 말고 살자라고 생각했다.

17살 이후로 한번도 변치 않는, 당당한 삶을 맞이 하는 자세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개소리다.

사실은 그 다짐이 날 점점 더 소심하게 만들고 또 소심한 인간을 위한 다짐중 하나다.

쪽팔리지 않게 살자 라는 건 표면상으로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지간에

부끄럽지 않게, 자랑 스러운 인간의 프라이드를 놓치지 않길 바란 거지만

그 다짐의 이면에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한 미련이

책임감의 가면을 쓰고 왕좌를 차지 하고 있는 탓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무수히 쪽팔린 짓을 하고도 잘만 살았다.

남들에게든... 나 자신에게든...

미련하게도...

 

나는 아직도 고집이 세고 미련맞고 선택하는 일이 서투르다.

포기하는 일도 서투르다.

 

잃어버린 지갑이나 찢어진 새구두 따위에 포기가 쉬운 것은

그 집착 마저 버리지 않으면 미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조직의 결정을 눈앞에 두고도 미련 맞게 전화 통화 내용을 되새김질 하고 있다.

난 기본적으로 쿨해지기 힘든 타입임이 초등학교 2년차에 밝혀진 셈이다.

그날 이후 30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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