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이 그림일기

'90 대입학력고사 수험표 공개.. 우하하

영혼기병깡통로봇 2004. 9. 14. 09:16

나의 10대는...
보잘것 없었다.

 

공부... 공부도 그랬다.

 

공부 말고는 그닥 할 것도 없었던 주제에
공부도 할 이유가 없었던 나는
그저 중간 쯤에 그물 치고 앉아서
평균깍아 먹는 좀벌레를 겨우 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날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학교 도서관에 앉아 있던
고3 여름 부터 다시 기억이 시작된다.

 

왜였을까...

왜 난 갑자기 공부를 시작 했을까...

그것도 가망도 없는 고3 여름에...

 

그저 내생각에

그때쯤 학교에서 마련한 고3전용 도서관이란게
생겼는데
성적이 우수한 학생만 성적순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매월 모의고사 결과에 따라서
경계선에 걸터 앉은 아이들끼리는 늘 희비가 교차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거기 들어가 있었던 걸로 보아 아마 나의 목적이 그것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개새끼들... 니들이 그러고도 교육자냐 싶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나도.. 신분상승의 급행열차를 타서 저 반짝이는 도서관 복도에서 선생님들의 화사한 눈빛으로 샤워를 하고 싶었던가...

 

난 성적이 결코 우수하지 않았을 뿐더러 머리도 좋지 않았다.
지금도 머리는 나쁘다.
잔머리는 아주 잘 쓰는 편이다.
그건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숙달된 거라고나 할까... 일종의 생존 무기 같은...

 

붙을 거라는 기대따위는 아니었다.
고3 여름에 갑자기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 무엇을 기대했으랴...

 

그래도 군말 없이 원서 넣어 준걸 보면
막판 스피치를 무섭게 올리는 나에게
혹시 쟤....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던 담임이 잠깐 정신이 나가서 속아 준거 뿐이었을 것이다.

 

시험 보던날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떨어지면 뭐할래?

 

그래서 난 이렇게 대답했다.

 

재수 시켜주세요.. 미대갈래요.

 

그랬더니 아버지는 말없이 문 닫고 나가 버리셨다.

 

나의 완승이었다.

그러게... 힘들게 시험 보고 온 딸래미한테 수고했다는 말정도는 해줘도 좋았잖아...

일평생 아버지와 나의 거리는 이런식으로 점점 벌어져 갔다.
그 시작점..

 

정체를 알 수 없이 솟아나와 버렸던 패기와 싸가지 없었던 독기에도 불구하고
그때 국문과 커트라인이 280점이 넘었고
나는 체력장을 합해서 겨우 260점이 될까 말까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떨어졌다.

 

공부하는 즐거움을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뻔도 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만약 내가 공부하는 즐거움을 일찌감치 깨달아서 마담뚜의 공격대상이 되는 학과에 들어가 좀더 화려한 꼬리표를 달고 세상에 출사표를 던졌더라면

나에겐 그만큼의 인맥과 네트워크가 형성 되었을 거라는 것을 직장생활 10년 만에 깨달았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편지 라는 글이 유행한 적이 있는데

그 글 중에  정확하진 않지만 이런 내용의 구절이 있다.

 

" 반에서 1,2 등을 다투는 아이가 있으면 돈독한 우정을 닦아 두어라. 그 아이들은 나중에 니가 직장생활을 할때 너의 상사이거나 너의 밥줄을 쥐는 거래처의 담당자 이거나 곤란할때 너를 도와줄 든든한 백이 되어 줄 것이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러나 만약 그때 덜커덕 붙어버렸더라면
지금과는 달랐을 것 같다.
나쁜의미에서...

 

그건... 대체적으로 지금의 나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것들 중에...
만족하는 부분이 몇가지 있는데 그것이 되기까지의 기초가 되었던 무언가 핵심을 얻었던 것이..
대학이었고.. 그건 고대 국문과에서 얻어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님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의 선배와 후배들을 만나 이야기 하는게 좋았다.
그들 특유의 사유의 질이 좋았다.
그리고 그들의 고뇌하는 방식은 너무나 매력적이 었고 그 매력적인 향기가 가득한 캠퍼스의 고단한 투쟁도 좋았다.

 

나는 그들과 함께 공부라는 걸 하는게 좋았다.
늦게서야..

 

참 행복한 시절이었다.

 

내가.. 내 대학 시절을 후회하지 않는 것..
내가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것은
단하나.. 그 것 때문이다.

 

그리고 그시기는 지금의 내가 있기 까지
그나마 세상살이의 핵심이었던 잔머리 굴리기에
화려한 장식 몇가지를 꽂을 수 있도록 해준 밥벌이의 기반이 되어 주었다고나 할까..

 

좋은 시절이었다.

아직도 늘 과거의 기억에 사로 잡혀 꿈을 꾸고 있는 거나 아닐지 의심 될만큼..

 

난 아직 그곳에 남아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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