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로봇의 노래

또라이 기질이 그립다.

영혼기병깡통로봇 2003. 8. 7. 05:13
한 석달 만인 것 같다.

오늘도 쉬어보자고 작정 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되었든 게으름이라는게 한번 시작하면 곰팡이 보다 번식력이 뛰어나며
또한 물보다 흡수가 빨라서 순식간에 머리카락 끝에서 부터 발뒤꿈치에 이르기 까지 아니 머무르는 곳이 없다.

아침에 눈 떠서 아.. 일해야지 라고 생각했던 내가 2시간 쯤 후에 티비를 보고 있었고..
이제 나가야 겠다 생각했던 내가 또 오징어를 버터에 굽고 있었고 한시간 반쯤 후엔 침대에 누워 침을 흘리고 있었다.
티비와 민이가 각각 다른 얼굴, 다른 목소리로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어두운 공간안에 누워 있는
나의 시계는 저녁 8시...

지치고 지친 마음이 마치 네덜란드 소년의 자그마한 손바닥으로는 도저히 버텨내기 힘든 거대한 댐의 구멍안에 갖혀 있었나보다.

난 잘 살아 내고 있는 줄 알았다.

간밤에... 언니와 통화만 하지 않았어도... 너무 오랜만에 티비 앞에 앉지만 않았어도...
담배가 떨어지지만 않았어도...

아마 그런 것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난 더이상 혼자 앉아 울지도 않을 것이며 떠난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수천번 외쳐대는 침묵의 언어도 더이상 되뇌이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에게도 엄마에게도 언니에게도 더이상 연민이라는 이름의 주제넘은 감정으로 독을 키우지도 않을 것이다.

하하...
요즘 난 연애상담 전문가로 거듭나고 있다.
물론 그들을 위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들어주고...
같이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이 웃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구성애 아줌마가 아우성이라는 강의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가장 큰 이유,
그녀의 설득력 속에는 그녀가 경험한 참혹한 과거가 이해의 전기를 흘려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아팠던 사람의 아픈 이야기가 지금 아픈 사람의 마음에 따뜻한 이불을 덮어 줄 수 있기 때문이리라...
나도 누가 나에게 그 따뜻한 이불을 덮어 줬으면 좋겠다.
나도 그들에게 따뜻한 이불을 덮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같이 따뜻했으면 좋겠다...

요즘 난 참 많이 변해가고 있는 걸 느낀다.
많은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에게 했던 나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지기도 한다.
그리고 오히려 예전에 내게 장점이라고 여겨졌던 부분들이 퇴화하고 있는 것도 느낀다.

또라이 기질....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자 애쓰는 동안 내안의 또라이 기질이 사그라져 간다.
내가 일하는 동안 나의 힘이 되어 주었던 그것이 나의 인간관계에 독이 되었던 것인가는 잘 모르겠다.
예전처럼 혼자 예술영화관을 뒤지지도 않으며 남들이 좋아하지 않은 독특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혼자 술집을 찾는 일도 없다.
한밤에 눈을 맞으러 나가지도 않고 길거리를 몇시간동안 걷는 일도 없다.
아무하고나 어울려서 새벽을 도모하며 인사동과 인천을 오가는 일도 없고 거리의 악사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노는 일도 없다.
장대비를 맞으며 고수부지를 뛰어 다니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절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젠 다른 괴상한 비주얼을 뽑아내지도 않고 그저 잘팔릴 수 있는 디자인, 클라이언트가 좋아할 만한 대중적인 디자인을 뽑아낼 수도 있다.

그래도 예전 직장 동료에게 들었던 한마디가... 가슴에 비수 처럼 꽂힌다.

너의 또라이 기질이 그립다...

또라이 기질이라...
나도 사실은 그게 그립다.
미쳐 있었던 건 그때의 내가 아니라...
어제까지.. 오늘 까지의 나였기를 바란다.
되돌아 가야겠다.

마음안에 커졌다.. 사그라졌다 혼자 세월을 세어 가는 달을 키울 것이 아니라 또다시 미쳐 봐야겠다.


'깡통로봇의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밤이 좋다  (0) 2004.01.07
엽기뻐꾸기  (0) 2003.08.07
난또라이다  (0) 2003.08.05
또다시 시작한 번민의 여행  (0) 2003.07.30
가슴안에 한껏 부푼 풍선을 감추고  (0) 2003.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