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로봇의 노래

소주와 오징어와 서른넷의 밤

영혼기병깡통로봇 2005. 6. 5. 15:28

차장님, 저 차장님이 좋아요 저랑 사겨요!

 

녀석은 아주 약간의 알콜을 핑계삼아 거두절미 하고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놈의 머리속을 알만도 하다.

앞뒤 재지도 않겠다.

머뭇거리지도 않겠다.

부끄러워 하지도 않겠다.

마치 14살 소년처럼 용감하게, 순수하게 보이지?

 

금요일 저녁, 아니 토요일 새벽 두시

뜻밖에도

산오징어회와 소주 한잔과 귀여운 청년의 프로포즈로

반짝거린다.

 

 

-- 그래, 당장 사겨 냐하하하~

 

-- 에이씨... 머 이리 싸...

 

-- 그니까 당장 가서 어머니랑 쇼부치고 와라 당장 결혼하자

    내가 어른 공경 이런거 진짜 잘한다.. 그리고 난 현모양처가 꿈이니까

    돈 마니 벌어와야대 알찌~

 

-- 장난치지마요ㅡ.ㅜ 무선 아줌마 가트니 ㅡ.ㅜ

 

 

 

얼마나 어이없고 얼마나 웃기는 녀석인고 하니

자기랑 안놀고 다른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거나 재미나게 웃으면서 얘기 하면

샘이 난댄다.

초딩이냐 ㅡ.ㅡ...

 

녀석은 지금 딱 계란한판이다.

4살차이.. 까이꺼 내가 좀 이뻐라 해주면 대긴 하지

내가 따질 처지냐

녀석의 용감무쌍한 한판에 가문의 힘을 모아 감사의 축전을 보내도 시원찮을 뿐이다..

 

총각 복받을껴...

 

울엄니도 감사해 마지 않을게다.

 

뭐... 대애충 그랬다.

산오징어도 점점 졸음에 겨워 다리 몇개가 힘을 잃고 거센 발악을 포기할 즈음

분기탱천했던 녀석의 프로포즈도 그렇게

스르륵 농담처럼 진담처럼 장난처럼..

술자리가 끝이 났다.

 

녀석도 알고 있으리라.

심각하게 받아주지 않을 것임을..

그렇다고 완강히 거절도 하지 아니할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도 알고 있나?

 

말도 안되는 헷소리임을 알고 있음에도

녀석의 그 한마디에

녀석의 외모, 성격, 성향, 월급, 부모님,

가문, 나이, 학벌, 교우관계에 관한 Map을 순식간에 그리고

30년 전부터 4-50년 안팍의 장래의 일까지 파노라마가 스쳐가는 

나이 마아안은 아줌마의 마음..

 

저녀석은 과연 내나이 50에 동네 박스 주으러 다니면서

길거리에 앉아 담배를 뻑뻑 피는 건너편집 할머니를 볼때마다

나의 미래가 투영되는, 소름돋는 상상으로 부터 벗어 나게 해줄까?

 

그러다가도 박스 주워다가 저놈 먹여살리게 되면 어쩌나..

차라리 앞집 할매가 낫네 ㅡ.ㅡ^

 

거기에 진도를 좀더 나가서

집사님이신 놈의 어머니와 교회에 나가야 하는 건가

젠장.. 내인생은 교회가 없으면 어째 그림이 안그려진다.

이쁘게 보일려면 찬송가 한둘은 반주 연습 해둬야 하는거 아냐 까지...

상상의 나래는 어느새 구름을 박차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블랙홀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택시 아저씨가 갑자기 말을 건다.

상상의 나래에서 돌아오는 순간 입가의 침을 닦고 정신을 가다듬는 나에게

아저씨는

몇살이냐고 물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스물둘?

으흐흐... 오늘 하루 운수대통이다.

 

아저씨는 아들이 여자친구를 데려왔다는 얘기부터 시작한다.

근데 그 여자 친구가

아들보다 4살이나 많더란다.

 

(오늘 대체 무슨 날이냐고... 4살 차이가 뭐 어때서요?)

 

아저씨는 계속 혼자 얘기한다.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아저씨의 4살 연상인 아들의 여자친구에 대해 어떤 생각인지가

왜그리!! 무지막지하게 궁금하던지!!!!

 

4살은 좀 너무 하지 않냐고 했다고 하셨다.

 

(그래요.. 너무하죠... ㅡ.ㅜ 너무 잘나서 일하다 보니 그리됐어요 왜요!!)

 

그런데 여자쪽에서 벌써 상견례를 하자고 한다고 하시더니 왈,

그럴만도 하지. 여자 나이 서른 셋이면 급할때도 됐잖아...

 

(젠장... 난 그보다도 많아요.. )

 

아이구... 쩝... 뭐.. 지들이 좋다면 뭐.. 어쩌겄어요

뭐 결혼 한다구 하면 해야지.. 어쩔껴...

 

(냐하하하.... 아저씨 췍오! 그죠 뭐.. 나이많은게 죄는 아니잖아요?)

 

감사했다. 이유는 모른다. ㅡ.ㅡ
내장 깊은 곳에서 부터 나도 모르게 울컥 솟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걸 간신히 참았다.

 

사실은 그저 이대로 살고 싶다.

새삼스레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가족의 굴레안에

굳이 이름 석자 들이밀 필요도 없었다.

 

다만 필요했던 건

꿀맛같은 한모금의 무엇일 뿐이었다.

 

한모금의 무엇을 얻고자

산같은 짐을 등에 짊어지는 일따위 조차 장미빛으로 물들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난 여전히 그저 한모금만을 원한다.

 

그래서 녀석의 손을 잡아 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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