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이 그림일기

미완의 그림을 다시 그리다

영혼기병깡통로봇 2002. 7. 9. 15:52
내가 그리 멀지 않은 학교를 다니면서도 기숙사를 택한 것은 아마도 그나이에 누구나
한번쯤 모반을 꿈꾸는 평범함을 나름대로 성취하고자 한 것이었다.
기숙사는 입사하기도 어려웠거니와 퇴사당하지 않기 위해 지켜야할 규율도 많았다.
누구도 본적 없을 듯한 왕눈꼽을 동무삼아 새벽 예배에 참석해야 했고, 8시 30분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귀가시간, 그리고 조금의 속삭임도 인정될 수 없었던 4시간의 학습시간...

좋다.. 아무래도 좋았다. 나의 최초의 도피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었으므로 그것또한
즐거웠다.

내가 지내던 기숙사는 벽도 바닥도 시멘트에 페인트칠 그대로의 아주 커다랗고 상막한 방
이었다.
캐비넷이 네개, 2층 철침대가 2개, 철책상 2개.. 그뿐이었다.
규정된 규칙이외에는 잠자는 일밖에 허용되지 않는 방이었다.
아니, 사실 은밀한 즐거움도 있었다. 가끔 월담을 하여 소주병을 숨겨들어와 밤을 새거나,
커피포트에 끓이는 라면은 그것이 사실 불필요한 객기라해도 은밀한 승리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나의 경쟁무기는 튼튼한 체력이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소주를 물고 와야 했으므로...

금요일 밤이 되면 학생들은 모두 주말을 보내러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기숙사의 금요일밤
은 숙제가 많거나, 집이 아예 멀어서 방학이나 되어야 돌아가는 학생 몇명만이 남아서
귀신 치마스치는 소리처럼 가끔씩 슬리퍼 끄는 소리를 내며 돌아다녔다.
난 가끔 별 할일 없이 기숙사에 남아있곤 했다.
혼자 있는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사치의 시간이었다.
아무도 없는 기숙사의 토요일 아침은 마법의성과 같았다. 조용히 혼자 일어나 햇살 받으며
먼지를 털어내고, 빨래를 하고,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나서 츄리닝에 슬리퍼를 끌고
학교로 올라간다.
풀밭이 많은 캠퍼스를 어슬렁 거리며서 난 마치 하루끼의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먼
곳을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있다 내려오곤 했다.

토요일 아침에 캠퍼스에서 내려오면 늘 책꽂이 뒷편에 뒤집어서 꽂아둔 파일을 꺼내어 교
회로 갔다. 기숙사에는 작은 교회당이 있었는데 그곳은 무덤과 같았다.
언제나 고요하고, 어둡고... 그리고 나의 비밀스런 주말의 사치를 죽음처럼 지켜주었다.
그것은 은밀하고 성스러운 의식 같은 거였다. 커다른 문을 조심스럽게 밀면 알리바바의
동굴과도 같은 무거운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는 착각을 하곤 한다.
그리고 피아노 앞의 조명만을 켜놓고 수많은 영혼들 앞에서 연주회를 시작하는 거였다.
교회당의 피아노는 기본 옥타브의 미가 망가져서 언제나 절름발이 음을 냈다. 중경삼림의
그 남자처럼 중얼거려 본다.
'다리가 많이 아프구나. 네몸은 네가 알아서 돌보도록 해야지...'
그래봤자 내가 연주할 수 있는 곡은 많지 않아서 언제나 똑같은 곡만 쳐댔다. 그래도 듣는
사람은 나뿐이니 나만 좋으면 되는 거였다. silver wave, Thanks giving, sting...
그리고 몇곡의 가요... 그래도 항상 틀렸다.
절름발이 미와 함께 건반위를 허둥거리는 내손가락도 점점 절름발이가 되어가는 듯 했다.

그렇게 어둠이 내리고 집으로 돌아갔던 동지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면 오르골 상자를 덮어
침대밑에 숨겨두듯 조용히 교회문을 닫고 방으로 돌아와 그들의 주말담을 들으며 큰소리로
웃곤했다.

지금도 가끔 그때를 생각한다. 나에게 기숙사는 억눌렸던 나의 내면이 환경으로 부터 자유
로울 수 있는 안전지대 같았다. 30대 후반의 여류작가 같은 여유를 느끼게 했던 그시절이
마치 전생에서나 있었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20대 초반에 꿈꾸던 30대의 모습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난 지금도 20대 시절의 방황을 멈추지 못하고 있나보다. 비만 오면 혼자서 길을
걷거나 바람부는 토요일이면 혼자 종로에서부터 대학로길을 걸어 아주 지루한 예술영화를
보고 창문이 넓은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서 일상으로부터의 도피를 시도 했던 그
시절과 다른게 있다면 혼자 앉은 까페의 창문에 어린 그림자가 그때 보다 더욱 어두워졌다
는 것뿐...

그리고...길을 걸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는 사람을 한명쯤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곤 하는 것이 또 다르다. 더 많이 약해 진걸까..
그저 외로움을 즐기던 객기는 간데 없고 뼈쏙까지 스미는 우울에 치를 떨고 있는 나를
발견 할 뿐이다.

작은 일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 내지 못하고 또다시 무덤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싶은
하루를 보냈다. 실은 그다지 화낼 일도 못되는 것인데 내가 히스테릭해 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빗소리에 묻혀버릴 수도 있었을 법한 심장의 고동소리가 빌어먹게도 온몸으로 피를타고
흐르는 하루..

언젠가는 상념을 방해 받지 않는 나의 성을 쌓게 될 것이다. 잠깐의 도피가 아닌, 부딪히
는 수많은 어깨들로 부터 벗어나 나만의 세계를 견고히 하여 창밖의 풍경을 다소는 가소롭
게, 무의미한 시선을 꽂아 볼 것이다. 커피포트의 라면이나 절름발이 연주가 아닌 완전한
자유를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