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이 그림일기

그 겨울, 보일러가 터진 방바닥에서

영혼기병깡통로봇 2005. 4. 11. 09:45

 

2002년,

월드컵상암경기장의 이름이 가장 화려하게 빛났던 나날들.

나에게 그 곳은 그저

쓰레기 매립지였고

산에서 부는 바람이 끔찍했고

산밑으로 부터 벽을타고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습기와

산을 오르는 것만큼이나 가파른 골목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그런 나날들이었다.

 

버스를 내려서

골목길을 숨이 턱에 찰때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는 산꼭대기였다.

겨울에는 땅을 짚으면서

앉은뱅이처럼 기어야만 겨우 무사히 전철역까지

걸어 내려 올수 있었던 지리한 언덕길을 내려간다.

 

산을 깍은자리, 절벽에 가장 맞닿아 있는

꼭대기의 오래된 연립주택에서는

한겨울에도 산에서 내려온 습기가

만년설처럼 곰팡이가 되어 벽지에, 장판사이에, 옷 사이사이에

온갖 미생물의 정글이 되곤했던.. 지하골방..

 

매일 저녁 그 길을 오를때마다

아... 인생은 그저 마냥 견디기만 하면 되는걸까..

그러면 또 봄꽃피는 들판을 조용히 걷는날도 올까..

의문에 쌓이곤 했다.

 

그리고 한겨울 눈이 미친듯이 오던 어느날

급기야는 보일러가 터져 버렸다.

바닥엔 물이 흥건히 고이고

파이프에선 미친듯이 물이 치솟았다.

 

빌어먹을....

 

인생은 잃을 것이 그닥 없을 것 같은 순간에도

기막히게 잃을 것들이 드러난다.

그리고 희망도 같이 잃으며 시베리아 벌판같은 한파가 가슴을 뚫고 지나가고도

또 얼음장같은 파도가 덮치는 그런것 같았다.

그래도 정말... 끝까지 걸어야 하는걸까.

 

방바닥을 다 털어내어

한번 이으면 100년은 간다는 동파이프로 썩은 파이프를 잇고

가스밸브를 틀어 따뜻한 물을 흘러보내면

방바닥은 다시 온기가 가득할 것이다.

 

인부를 부르고 가격을 흥정하고 방안의 짐을 치우고

장판을 걷어내어 시멘트를 뜯어내고

파이프를 죄다 걷어서 새파이프로 이식을 하고

다시 시멘트를 바른다.

장판을 깔고 벽지를 다시 바르고 짐을 다시 옮기고

아무일 없었던 듯이 다시 슬그머니 수도꼭지를 열어

파이프에 물을 흘러 보낸다.

 

내 심장에도 백만년동안 녹슬지 않는 동파이프를 이어 따뜻한 온기 흘러 보내면

다시 인생의 봄날을 맞이 하게 될까 싶었다.

그러나 번거로운일...

겪지 않아도 될만한 귀찮은 일들이다.

 

대충 견뎌볼만도 할 것이다.

 

심장이야 틀어막으면 될 일.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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